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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
  • 설교일2021-02-14
  • 성경본문마태복음 21:1-11
  • 설교자정영태 목사
설교게시판 내용
설교내용
본문내용
1.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기도 합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그 일을 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인간을 구원을 하시 려고 하시는 것일까? 무슨 이유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해내시 려고 하시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는 하셨지만, 지금의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타락했고, 모든 인간이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처음 만드셨던 그 인간의 모습은 어디서도 우리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인간을 만들었을 때는 이런 인간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만드셨던 그 인간으로 모든 인간을 되돌리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 목적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이 되고, 우리의 구원이 완성이 되게 되면, 구원받은 우리들은 타락하기 이전에 아담과 이브의 모습으로 범죄하기 전에 이간의 모습으로 그렇게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33년을 사시다가 가셨습니다. 33년 중에 30년은 가족들과 함께 가족들을 위해서 사셨던 삶이고, 나머지 3년은 메시아로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사셨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특별히 30년은 예수님의 사생활이라고 말하고, 3년은 예수님의 공생애라고 이렇게 우리가 구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생애 3년의 마지막은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위해서 공생애 3년이라는 시간이 꼭 필요했던 것일까? 2년이나, 1년의 삶으로는 십자가의 죽음이 불가능했을 것인가? 그래서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가?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공생애 3년이라는 그 시간이 왜? 하필이면 공생애 3년일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공생애 3년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고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공생애 3년을 통해서 하신 일들이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하고 큰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 자신이 성경에 예언되어 있던 메시아다! 그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본래 나 같은 모습으로 창조하신 것이다. 타락하기 이전에 인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하는 것을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과 타락하기 전의 인간의 모습이 이런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데 최소한 3년의 기간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우리가 항상 유념해야 하는 것은 그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서 아!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라고 이 세상에 보내신 메시아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생애 3년 동안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삶의 모습을 보면서 ! 본래 인간의 모습은 저런 모습이구나! 우리가 타락하지만 않았다면 우리가 범죄하지만 않았다면 우리가 예수님처럼 저렇게 살 수 있는 것이구나!’ 해서 궁극적으로 구원이 완성 되는 그날에는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저런 삶의 모습으로 우리가 살게 되겠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고, 소망하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도 사실은 그런 관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아주 간단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21:1~3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 오게 되면 그들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감람 산입니다. 이 감람 산으로 나 있는 작은 길들이 있는데 그 작은 길을 따라 올라가서 정상 부분에서 예루살렘 쪽으로 나 있는 서편의 길을 따라 내려가서 기드론 골자기를 건너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오게 될 때 먼저 만나는 산이 감람 산인데 감람 산 초입에는 작은 2개의 마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나사로와 마리아가 살고 있던 베단이라는 동네이고, 다른 한 동네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벳바게라는 동네입니다. 이 두 동네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대략 2km 내지 3km 정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무척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2~3km 가면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는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이제부터 나귀를 타고 갈 것이다. 그러니 가서 나귀를 구해오너라! 하고 2명의 제자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동안 너무 걸어서 오시니라 힘이 드셔서 그런 것은 아닐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사실 예수님은 벳바게에서 나귀를 타시려고 하면 안 되고, 사실 여리고에서부터 나귀를 타고 오셔야 합니다. 왜냐면 여리고 하고 예루살렘은 고도차가 굉장히 많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여리고 해발 2,500M 있는 마을이고, 예루살렘은 해발 80M 높이에 있는 성읍입니다. 고도차가 거의 1,000M 나 납니다. 그러니 여리고부터는 예루살렘까지 계속 오르막길입니다. 반대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는 계속 내리막길입니다. 완만하게 계속 올라가야 합니다. 어느 정도의 경사도를 가지고 있는 거리인가? 만약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자전거를 타고 여리고를 간다고 하면, 페달을 한 번도 밟지도 않고 여리고를 갈 수 있을 만큼 완만한 내리막길입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이 생각할 때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 중에 가장 어려운 코스가 여리고에서 예루살렘 구간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걷는 것이 힘들다면 예수님이 어디서부터 나귀를 타고 가는 것이 좋아요? 여리고에서부터 나귀를 타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어려운 코스도 잘 걸어오셨는데 이제 2~3km 밖에 남지 않은 그 시점에서 굳이 나귀를 타시겠다고 말씀하시느냐? 그 면도 이해가 안 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 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2명의 제자를 보내면서 나귀를 가지고 오라! 말씀하실 때 돈을 주면서 어디 가면 나귀가 있으면, 나귀 한 마리를 사가지고 오너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제자들에게 어디를 가면 나귀가 묶여 있는 것을 볼 것이다. 내가 이미 사전에 나귀의 주인과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다 끝났으니깐 그냥 너희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알아서 줄 것이다. 끌고 오너라!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나귀를 끌고 오는 것이 뭐가 어렵겠습니까! 아니 그런데 남의 나귀를 아무런 말도 없이 가서 풀어서 끌고 온다. 여러분들 같으면 저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주인이 왜? 남의 나귀를 풀어서 끌고 가느냐? 물으면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그럽니다. 아니 그 말 한마디에 다 끝나는 것입니까? 이야기가! 사실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나귀의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나귀가 흔한 동물이기도 해도, 그래도 꽤 돈이 나가는 동물인데, 자기의 재산을 가지고 가겠다는데 그냥 별말 없이 그냥 가지고 가라고 이렇게 내 줄 수 있는 주인이 도대체 얼마나 있겠습니까! 도대체 그 주인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이해가 안 되니깐 그래서 많은 성서 학자들이 추적하는 것입니다. 아마 그 나귀의 주인은 아마 예수님하고 아주 친분이 가까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12제자 속하지는 않았지만, 평소 예수님을 따랐던 예수님의 제자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시는 분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께서 오래전에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 나귀의 주인에게 이미 다 의논하고, 상의를 한 것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풍랑이 있는 바다를 잠잠하게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권세고, 권위입니다. ? 그러느냐? 주께서 쓰시겠다고 했다. 하는 주님께서 쓰시겠다는 그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권세와 권위 앞에 이 나귀의 주인이 그냥! 완전히 경외감에 사로잡혀서 나귀를 풀어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일에 2제자가 어떻게 순종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일에 그 나귀의 주인이 순종할 수 있었느냐? 그리고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예루살렘에서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 주님은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이 됩니까? 이렇게 말이 안 되는 예수님! 말이 안 되는 2제자! 말이 안 되는 나귀의 주인! 그러나 그들은 말이 되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다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사건을 통해서 그 메시지를 우리에게 강력하게 전달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인간을 만드셨을 때 그 인간은 이렇게 말이 안 되어도, 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본인이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이 어떤 것이냐!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에 말이 안 되어도, 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그런 백성들로 이루어진 나라! 주님은 그런 나라를 지금 만드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는 말씀 한마디로 묶여 있던 나귀가 풀려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쓰시려고, 묶여 있는 나귀를 풀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나귀에게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려고 할 때 어떤 경우에는 질병에 묶여 있는 사람을 질병에서 풀어 건강하게 하셔서 주님께서 쓰시기도 하시고, 어떤 사람은 사업과 물질에 얽혀있는 사람을 그것을 풀어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쓰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질병에서 풀어 주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그 건강을 가지고, 남은 생애를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 건강을 다른 곳에 쓰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쓰겠습니다!’ 이런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또 사업이나, 물질로 묶여 있을 때도 하나님! 묶여 있는 이 물질의 문제만 풀어 주신다면, 주신 그 물질을 이제는 나를 위해서 쓰지 않고, 정말 주님을 위해서 쓰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풀어 주시면, 그 약속을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서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쓰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준다면, 우리가 어떤 것에 묶여 있든지, 반드시 하나님은 풀어서 자유케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왜? 입성하시는지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본래 이스라엘 땅에서는 말이 생산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있는 말은 모두가 다 다른 나라에서 수입해 온 것입니다. 말을 수입하는 이유는 다 군사적인 용도로 쓰기 위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나귀는 이스라엘 땅에서 많이 생산되는 동물중에 하나입니다. 가장 흔한 짐승중에 하나가 나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말을 구하기가 어렵고, 상대적으로 나귀가 손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일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스가랴 9:9 마지막 부분을 보시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미 구약성경 스가랴서에 예언되기를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다. 이렇게 예언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 나귀를 타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그렇게 예언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이해됩니다. 구약성경에 예언되기를 예수님이 말을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다. ? 그렇게 예언되지 않고 하필이면 나귀를 타고 입성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이 그래도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하는데 말을 타고 입성하면, 뭔가 늠름해 보이고, 메시아로서 어떤 품위도 있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나귀 새끼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올라타면 발이 땅에 달듯말듯한 작은 동물입니다. 그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뭔가 품위도 없어 보이고, 뭔가 좀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굳이 왜? 성경에는 예수님이 꼭 나귀를 타고 입성하기로 예언이 되어 있는 것일까? 그것은 나귀가 상징하는 중요한 특징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나귀는 주인이 정해 놓은 구유에서만 먹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구유에서는 먹지 않습니다. 자기 주인이 만들어준 구유! 자기 주인이 밥을 주는 그 구유에서만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나귀는 자기 주인에게 순종하는 짐승이다. 그런 인식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 속에는 그래서 이사야 1:3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 말의 의미는 나귀는 그 주인의 말씀에 순종하거늘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기 주인지지도 모르고 그 주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느냐! 지금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귀가 가지는 또 하나의 특성은 겸손함입니다. ? 나귀를 겸손 하다고 보느냐? 그것은 자기 주인의 말에 철저하게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순종이라는 말과 겸손이라고 하는 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말입니다. 결국 순종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고, 불순종하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보시는 관점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순종을 하는 것이고, 교만하면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생각에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는 모습이 왠지 궁색해 보이고, 초라해 보였지만, 그러나 그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아주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아주 열렬하게 예수님을 환영했다는 것입니다. 열렬하게 환영하는 그 분위기와 나귀를 탄 예수님은 전혀 분위기상으로는 맞지 않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1:8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가시는 길에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그 길에다가 깔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깔았다는 것입니다. ? 그랬을까? 그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 하필이면 겉옷일까?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소중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 겉옷입니다. ? 그러느냐? 민수기 15:38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우리는 언뜻 이해가 안되는 것인데 설명하면 이런 것입니다. 지금 제가 입은 양복의 겉옷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겉옷이 있는데 우리가 옷을 만들 때 보면 실을 가로와 세로로 짜서 옷을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면을 만들어서 옷을 만들면, 가로세로로 직조를 해야 하는데 끝부분에 가서는 이렇게 가로세로로 직조하지 않고, 세로로 실을 나두라는 것입니다. 실을 나둡니다. 그러면 내려온 실을 여러 가닥으로 꼬와 가지고 묶습니다. 그것이 술입니다. 옷단 끝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면 그것이 그들이 지켜야 할 율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겉옷에 달린 그 수를 보면서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는 백성이구나! 그리고 나는 율법을 지켜야 되는 구나!’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옷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또 일부 사람들은 자기가 입고 있는 그 겉옷이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자기의 신분이나, 자기의 지위나, 자기의 어떤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를 표현하려고 하는 도구로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겉옷이 그만큼 그 사람에게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벗어서 길가에 깔았다. 이것은 상상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그 행위라는 것은 무엇이냐? 나의 모든 것을 주님 발아래 놓습니다. 주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주님이 나의 왕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던져서 주님이 자기를 밟고 지나가도록 그렇게 자기는 메시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겉옷을 길가 던지면서 지금 예수님을 메시아로 예우하는 것이고 그렇게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곹옷을 입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다가 깔았는데 그 나뭇가지는 보통 나뭇가지가 아니었는데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종려나무 가지라고 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대추 야자나무라고도 부릅니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가장 멋있는 나뭇가지입니다. 곧게 길게 뻗었는데 정말 그 나무를 보면 그렇게 우와 하고, 품위가 있어 보입니다. 나무 모양이! 그래서 그들은 이 종려나무 가지가 이렇게 아름답게 생겼기 때문에 뭔가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나무! 영광을 상징하는 나무! 기쁨을 상징하는 나무! 또는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 그런 생각으로 종려나무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장수가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많은 사람들이 그 개선장군을 환영해 줄 때 이 종려나무 가지를 사용했습니다. 나뭇가지를 꺾어서 개선하는 장군 오는 길에다가 깔기도 하고 그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열렬히 개선장군을 환영했는데 지금 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환영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로서 그렇게 환영하는 것입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호산나!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그렇게 지금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지금까지 공생애 3년 동안에 전혀 보지 못했던 광경을 우리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갑자기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졌을까? 아마도 이것은 여리고에서부터 함께 순례길에 올랐던 그 사람들이 아마도 주도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로 바로 하루 전날 여리고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2명의 맹인의 눈이 예수님의 도움으로 눈을 띄게 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루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눈을 뜬 그 장본인이 그 순례자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감람 산 근처에 왔을 때는 북쪽에서 온 순례자! 남쪽에서 온 순례자! 이미 와있는 순례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모여 있는지 모릅니다. 그때 예수님과 함께 왔던 여리고에서 온 순례자들이 뭐라고 이야기했겠습니까? 이분이 바로 어제 2명의 장님의 눈을 뜨게 했다. 바로 이 사람들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 되면 거기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2년 전에 예수님이 문등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았다. 나는 1년 반 전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일 때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확산이 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무엇을 기념하는 날입니까? 애굽의 포로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고 구원받았던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하셨던 일들이 막 오고 가면서 분위기가 고조되니깐 이 분이야 말로 우리를 로마에서 구원해주실 메시아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구원하소서! 외칩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호산나! 그렇게 막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2~3km 그렇게 열렬히 호산나를 외치면서 열정적으로 메시아를 환영하면서 그렇게 왔는데 막상 그들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왔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태복음 21:10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이미 예루살렘 성전 안에도 이미 와있는 많은 순례객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특히 제사장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성안에 있는데 저 밖에서부터 소리를 지르고, 찬송을 부르면서 오는데 예사롭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묻는 것입니다.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지금 너희들이 이렇게 하는 것이냐? 묻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겠습니까? 저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입니다. 그분은 바로 어제 2명의 맹인을 치료하셨습니다.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메시아가 오시면 눈먼 자를 띄게 해줄 것이라고, 예수님은 그뿐만이 아니라 저런 기적과 이런 기적 다행하신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분명합니다. 이렇게 대답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쉽지만, 그들이 그런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21:11에 그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갈릴리에서 온 선지자 예수입니다. 정말 그들이 선지자를 위해서 자기 겉옷을 벗어서 길가에 깔아 놓은 것입니까? 정말 선지자 한 사람을 위해서 호산나를 그렇게 목이 메이게 불렀던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분명 메시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종교지도자들이 그렇게 물었을 때 그들은 종교지도자 앞에서 주눅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종교지도자들의 권세와 위세가 높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저 종교지도자들에게 밉보이면 유월절도 예루살렘에서 지키지 못하고, 고향으로 쫓겨갈 수도 있다. 그런 두려움이 생기면서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 예수입니다. 그렇게 답변한 것입니다. 너무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끝까지 예수님을 따를 것입니다. 약속했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때의 무리들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주눅이 들어서 할 말을 다하지 못했던 것처럼 요즘 교인들은 계속해서 교회를 비난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여론에 주눅이 들어서 정말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 앞에서든지 저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입니다. 저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렇게 정말 당당하게 말할수록 있을까?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것이고, 끊임없이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름 없는 나귀 한 마리가 주님에게 쓰임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들의 남은 생애도 그렇게 주님 앞에 쓰임 받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귀가 그 주인의 말에 그렇게 순종하는 동물로 인식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주인 되신 주님의 말씀에 그렇게 순종한 겸손한 주의 백성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라고, 그런 크리스천들이 될 수 있도록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되게 하는 것임을 항상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순종을 배우게 하시고, 우리 삶의 모든 환경을 순종을 훈련하는 기회로 삶을 수 있는 지혜도 허락해주시옵소서. 순종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시고, 순종이 주는 복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우리가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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