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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섬김의 삶입니다
  • 설교일2021-01-31
  • 성경본문마태복음 20:20-28
  • 설교자정영태 목사
설교게시판 내용
설교내용
본문내용
20.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 말 속담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 또는 제 버릇 개 못 준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뀐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자주 듣는 말들은 뭐! 예수를 믿어도 사람은 잘 변하지 않던데! 그런 말입니다. 정말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사람마다 기대하는 부분이 다 다르기 때문에 자기가 변화하는 기대하는 것이 없어서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 공감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 것일까? 바뀌는 것이 그처럼 어려운 것일까? 오늘 12제자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그 이유를 한 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20:20~21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일종의 자리 청탁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이 드는 것은 저 두 아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말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로서 단순하게 예수님에게 그렇게 간청한 것인지? 아니면 두 아들이 어머니를 앞세워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예수님에게 대신 간청하게 한 것인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여러분들 생각에는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왜냐면 분명히 간청은 어머니가 했는데 예수님께서 답변을 주실 때는 그 간청한 어머니에게 답변을 주신 것이 아니라, 야고보와 요한에게 답변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보면 아마도 이것은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를 앞세워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금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러면 직접 예수님에게 자기들이 이야기해도 될 일을 굳이 어머니를 앞세워서 그렇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평범한 어머니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7:55~56를 보시겠습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이것은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실 때 그 현장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던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순서로 이야기합니다.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여기서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셉은 예수님의 동생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다시 말하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도 그곳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9:25 보시겠습니다.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한 사람이 더 들어가기는 했지만, 순서가 바뀝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 그 다음에 이모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이모? 예수님의 이모! 바로 그 이모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일 것으로 추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모가 무엇인가 간청한다면, 이모가 무엇인가 부탁한다면 확실히 예수님의 입장에서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앞세워서 자리를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분히 베드로를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 간청하는 일은 제자들이 직접 해도 되고, 어머니가 대신 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도 얼마든지 예수님께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간청하는 타이밍입니다. 구하는 타이밍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때에 하는 말을 합니다. 그러니깐 간청을 했는데 어느 때 했느냐? 그 때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에 하는 때가 언제냐? 마태복음 20:17~19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이 말씀을 가장 먼저 했던 것은 가이사 빌립보지역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처음으로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이사 빌립보에서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셨을 때 두 번째도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로 똑같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세 번씩 이렇게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와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것!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순종하기는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예수님이 스스로에게 다짐하시는 것입니다. 다짐하시고 또 다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는 나는 지금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너희들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이렇게 제자들에게 무엇인가 주의를 조금 더 환기시키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지금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죽으러 가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죽으러 가신다는 분에게 좌편의 자리를 주시고, 우편의 자리를 주시고 도대체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가당치 한 이야기입니까! 아니! 예수님은 죽으로 간다는데 죽으러 가는 분에게 그런 간청을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언뜻 생각하면 이 야고보의 어머니가 혹시 예수님에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아들 하나는 예수님의 좌편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고, 다른 하나의 아들은 예수님의 우편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해주십시오! 그렇게 간청한 것일까? 그런 어머니는 대단한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문맥상으로 보면 그런 간청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니 죽으러 가신다는 분에게 도대체 어떻게 그런 간청을 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를 못 하신 것 같습니다. 그 어머니도 그렇고,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고, 3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인데, 그 내용이 정말 이해하기가 어려운 내용입니까! 아니면 그 말씀을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렇게 해석할 수 있을 만큼 애매호한 내용입니까? 정말 예수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 가서 죽게 된다는 말씀을 아주 어렵게 말씀을 하셔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까? 아니면 애매모호하게 이야기해서 제자들이 해석하는데 힘이 들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들어도 다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고, 분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거나, 해석하지 않고, 자기들 생각대로, 자기의 임의대로 이해하고 해석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부터 어떤 생각이 있었느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날 주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인데, 주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로마보다 강한 그런 새로운 왕국이 탄생 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 생각을 예수님을 따르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똑같은 말을 세 번씩 하는 데도 그 생각이 여전히 바뀌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있으니깐 예수님께서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할 때 그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말만 머릿속에 있는 것입니다. ?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드디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니깐! 그 예루살렘이라는 말만, 그 단어만 강하게 머릿속에 들어 온 다음에 그 다음에 고난을 받을 것이다. 십자가의 죽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잘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들은 가볍게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말을 통해서 제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우리의 충성심을 테스트해보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아마도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임의적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일 처음 가이사 빌립보지역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이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베드로가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 안 됩니다. 예수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들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저희들이 할 것입니다. 하는 이야기를 베드로가 합니다. 그것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엄한 꾸중을 듣고, 책망을 듣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의 생각은 이야! 충성심의 경쟁에서 베드로에게 밀렸다. 저 말을 내가 먼저 했어야 했는데! 베드로가 먼저 했기 때문에 자기들은 그 충성심의 경쟁에서 밀렸다.’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 중에서도 누가 가장 그런 생각을 했을까? 베드로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아마도 야고보와 요한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의 입장에서는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아마 계속해서 엿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 만회하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가면 예루살렘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데 요직은 베드로의 자리로 굳혀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 생각에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무엇을 근거로 그런 생각 했느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님! 저 재물이 많은 젊은 청년이 재물이 많아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는데, 우리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는 어떤 보상이 있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해서, 나를 따르기 위해서 무엇인가 버린 사람은 몇 배나 보상을 받고, 영생을 상속받는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그리고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를 이어서 합니다. 그리고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에서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야고보와 요한의 생각에는 먼저 된 자가 누구일 것 같습니까? 베드로! 나중 된 자는 야고보와 요한!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지금이 기회다. 여기서 뒤집지 못하면 베드로로 갈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자기 어머니까지 동원하는 이런 일을 그들이 만들지 않았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녔습니다.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교육받고,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만큼은 변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세 번을 듣고도 그들이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것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4:50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어떻게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을 갈 수 있을까? 나름대로 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냐? 제자들의 생각에 지금 뭔가 돌아가는 이 상황이 자기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도망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생각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그 순간까지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그 생각으로 모든 것을 보고 판단했기 때문에 결국은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많은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그 하나는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바뀌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생각이 잘 바뀌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람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마다 자기의 생각이 옳다는 그릇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다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신앙생활이 어려운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나는 그저 신앙생활 하는데 술 끊는 것이 제일 어렵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분도 계시는데 그것은 사실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이냐면 지금까지 내가 예수 믿기 전에 생각해왔던 나의 모든 생각들이 대부분 나는 옳다고 생각해 왔는데 예수 믿는 순간에 그 생각을 다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다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생각을 바꾸는 것이 어려우니깐 생각을 바꾸지 않고, 그냥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고 그냥 예수를 믿습니다.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도 얼마든지 교회를 다닐 수 있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이것이 내 생각과 다른데 이런 생각이 들면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떠날 수가 있고, 믿음에서 떠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바꿔야 하느냐? 주님은 어떻게 생각을 바꾸시기를 원하시는가? 이것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에게 간청한 그 간청에 대해서 예수님이 답변을 주시는데 그 답변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0:22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두 가지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는 너희들이 지금 자리 하나는 우리 아들에게 이쪽 자리는 우리 아들에게 이렇게 좌우편의 자리를 너희들이 원했는데, 구했는데 내가 보니깐 너희들은 무엇을 구하는 것 조차도 너희들은 잘 알지 못하고 구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말하는 좌우편의 자리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너희들은 지금 내게 구하고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많이 합니다. 많은 간청을 합니다. 우리들의 많은 간청 속에도 어쩌면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너가 지금 기도하는 것! 너가 지금 간청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너는 그 의미도 제대로 모르면서 나에게 지금 달라고 지금 간청하고 있구나! 그런 기도가 많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서의 말씀을 보면 지식이 없는 소원은 통치 못하다.’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기도 외에도 성령님의 인도가 필요한 것이고,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야기한 것은 무엇이냐면 좌우편의 자리! 그 전에 너희들이 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들도 마실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말씀하시는 그 잔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쉽게 이야기하면 십자가의 고난 없이는 영광이 없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 구원이 없다. 그런 고난 없이 예수님의 좌우편의 자리도 없는 것이다. 너희들은 내가 마시는 그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러니깐 야고보와 요한이 네! 마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무엇을 구하는지도 모르게 구한 그들이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물었을 때는 또 아무런 생각 없이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주님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다 나두고 도망갈 수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잔도 어떤 고난의 잔, 십자가의 잔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왕국의 세워졌을 때 영광스러운 그런 것을 뜻하는 그런 잔으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그들이 무지해서 그냥 네! 저희들도 주님이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 대답을 했는데 주님은 그래도 그들이 한 그 말이 이루워지게 하십니다. 주님의 긍휼하심과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 모릅니다. 제자들은 다른 생각으로 네! 라고 대답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대답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12제자중 제일 먼저 순교하신 분이 야고보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반모스에 유배 당해서 결국 요한계시록을 쓰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답변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0:23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여기서도 두 가지 이야기하십니다. 하나는 그 자리는 내가 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자리다. 두 번째는 좌우편의 자리를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부정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야이! 놈들아! 하나님 나라에 무슨 좌우편의 자리가 있냐! 다 하나님의 나라는 공평한 나라야! 그런 자리란 없어!’ 그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좌우편의 자리가 있다. 다만 그 자리는 내가 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좌우편의 자리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 세상의 나라에 권력 순위에 따른 자리! 권력 순위 1, 권력 순위 2위 그런 자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게 될 텐데 하나님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섬길 수 있는 그런 자리! 하나님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자리! 그런 자리로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생각해보세요!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예배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 그 자리는 하나님과 굉장히 친밀한 자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목요일 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최후의 만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상상해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그렸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보셔서 알겠지만, 그 그림을 보면 식탁이 일자로 되어 있고, 예수님께서 정 중앙에 계시고, 좌우편으로 6명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나름대로의 어떤 생각을 가지고 구도를 잡고, 배치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유대인의 식탁은 일자가 아닙니다. 디귿 자로 되어 있습니다. 왼쪽 3명이 앉습니다. 1, 2, 3 앉고, 4, 5, 6, 7, 8, 9 앉자 있고 우측에 11, 12, 13 앉자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12제자도 아마 그렇게 식사를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디귿 자의 식탁 가운데 주님이 어디에 앉자 있느냐? 좌측에 앉자 있습니다. 좌측 2번이 주님의 자리입니다. 주님이 2번에 앉기 때문에 그 주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거나, 친밀감이 있는 사람이 1번과 3번에 앉게 됩니다. ? 그렇게 배치를 하느냐? 유대인들은 우리처럼 앉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고,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합니다. 1, 2, 3번이 앉으면 1번이 비스듬히 누으면 2번의 가슴쪽으로 기대게 됩니다. 2번도 이렇게 누으면 2번의 머리는 3번의 가슴으로 기대게 됩니다. 그런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21:20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중요한 것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하는 것은 예수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1, 2, 3번 자리에서 몇 번 자리입니까? 1번 자리입니다. 예수님이 2번에 앉자 계시고, 요한이 1번에 앉자 있는 것입니다. 3번 자리가 베드로나, 야고보일 가능성이 큽니다. 베드로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1번의 역할은 무엇이냐? 1번은 누워서 예수님이 식사할 수 있는 빵를 집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3번의 역할은 무엇이냐? 예수님이 비스듬히 누워있습니다. 편안하게 계속 누워있도록 쿠션 역할을 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움직이지 말고, 쿠션이 자꾸 움직이면 기된 사람이 힘들어집니다. 3번의 역할도 중요하고, 1번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이 역할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배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식사 때에도 이렇게 특별히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자리를 배치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친밀이라고 하는 그 관계를 통해서 이런 자리들이 배치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하신 것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20:28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는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가 보통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말을 예수님은 지금 섬김으로 다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도 섬김으로 해석하고, 십자가의 죽으심도 다 섬김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 하는 것입니다. 대속물이라는 말의 의미는 노예를 풀어줄 때 노예를 풀어주는 몸값으로 지불하는 그 돈을 대속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왜? 죽느냐? 사람으로 태어나면 꼭 한번은 죽어야 하느냐? 로마서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그랬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죄의 값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 죗값을 무엇으로 지불해야 하느냐? 자기 생명으로 지불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가 죗값으로 우리 생명을 줘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죗값을 예수님이 대신 갚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죗값을 대신 지불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자신의 생명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죗값을 대신 갚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죄로부터 자유케 된 것이고,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된 것이고, 이제 다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을 얻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예수님의 그 섬김을 모든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받게 되지만, 모든 사람이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게 되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그 많은 사람 속에 지금 우리들이 포함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니깐! 그러면 그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서 그 많은 사람 속에 들어온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주님이 지금 그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섬김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에게만 사실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본인이 창조주이기 때문에 자기가 만든 모든 피조물을 통해서 섬김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이 피조물을 창조한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섬겨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의무만 있지 피조물들은 섬김을 받을 수 있는 권리는 1도 없습니다. 그것이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섬김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1도 없는 피조물들이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를 탐내는 것이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타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장 루시퍼가 타락하게 된 것도 하나님처럼 섬김을 받으려고 그런 것이고,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고 타락하게 된 것도 하나님처럼 되어서 섬김을 받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루시퍼나, 아담과 이브를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피조물이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할수록 불행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피조물이 섬길려고 하면, 무엇인가 섬기려고 하면 그만큼 행복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나님이 피조물을 처음부터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란 무엇이냐? 여러 가지로 우리가 정의를 내릴 수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한다면 신앙생활이란 섬기는 삶입니다. 예전에 섬김을 받던 삶에서 섬기는 삶으로 바뀌는 것! 변화 되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믿는 그런 삶이라고 하는 것은 섬김을 받는 삶이 아니고, 섬기는 삶이구나!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바꾸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예수 믿고 나서 얼마나 변했느냐? 다른 곳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 사람의 삶의 자세가 섬기는 자세냐! 그것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변화면 다른 것들도 다 변합니다. 술 끊는 문제는 다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삶의 그 자세가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자세인가? 섬기려는 자세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말씀을 들을 때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구나! 주님도 그러셨으니깐 우리도 섬기며 살아야 되겠구나! 그런데 그것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생각을 바꾸는 것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변하는 것입니다. ? 어려우냐? 우리가 예수 믿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무슨 생각을 했느냐? 섬김을 받는 자가 갑이고, 섬기는 자는 을이고 갑의 위치에 있어야 행복한 것이고, 을의 위치에 있는 것은 불행한 것이다.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끊임없이 우리들의 생각을 붙들고 있었던 생각! 사로잡혀 있었던 생각입니다. 그 생각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왔는데 지금 예수님을 믿으면서 갑자기 이 생각을 바꾸라고 하니깐 이것이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생각 바꾸는 것이 힘드니깐 생각을 바꾸지 않고, 그냥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있고, 생각을 바꾸지 않고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생각을 바꾸지 않고, 얼마든지 교회를 다닐 수 있습니다. 그 생각을 바꾸지 않고, 얼마든지 신앙생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이것은 내 생각과 다른데 그렇게 생각이 들면 그때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떠나거나, 믿음에서 떠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뀌지 않는 생각이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믿음을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섬김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간단합니다. 섬김은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면, 그 상대방의 필요가 보입니다. 그러면 그 상대방의 필요를 위해서 우리가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그 필요에 따라서 우리가 헌신하는 그런 내용 중에는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서 말하는 것도 조심하고, 행동하는 것도 조심하고, 상대방의 필요가 이런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도울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돕는 것입니다. 그것이 섬김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냐면 예배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왜? 예배를 드리느냐?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겨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섬기는 우리들은 당연히 행복해져야 합니다. 공식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는데 예배하는 자가 행복하지 않다. 그것은 공식에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한데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지 못했다. 그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창조주가 영광을 받으시면 피조물은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배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16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예배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착한 행실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름만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섬길 때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착한 행실로 다른 사람을 섬길 때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 것을 통해서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섬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이해 했고, 그 목적대로 사셨던 분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순간에 가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함이러라! 어렵게 예수님이 생각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사는데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그렇게 말하듯이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들 가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분명히 우리의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그렇게 바꾸고 그렇게 우리가 살게 되면, 우리의 삶도 행복한 삶으로 변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행복한 사람들로 바뀌는 것을 믿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요! 도리어 섬김을 주려고 하고,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항상 우리 마음에 담고, 우리 마음 판에 새기게 하셔서 섬김을 받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섬기며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생각으로 우리들의 생각이 바뀔 수 있게 해주시고, 우리의 삶도 그렇게 바뀔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섬기는 삶을 통해 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되게 해주시고,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지는 행복한 삶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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