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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 설교일2020-12-20
  • 성경본문마태복음 18:15-20
  • 설교자정영태 목사
설교게시판 내용
설교내용
본문내용
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불교나 기독교나 다 같은 종교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점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불교의 특징 중에 하나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신앙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반면에 기독교 신앙의 특징은 공동체적인 성향이 강한 신앙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개인주의적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신과의 관만 있으면,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신앙 형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적인 신앙의 특징은 인간과 신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못지않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신앙의 형태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과 잘되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각자가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개인적으로 받지만 그러나 신앙생활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교회를 다니는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에도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만 함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식사도 함께하고, 성경 공부도 함께 하고, 교회 봉사도 함께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린 것만, 신앙생활이 아니라 이렇게 함께 식사도 하고, 함께 성경 공부도 하고, 함께 봉사하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신앙의 한 부분인 것입니다. 불교는 개인주의적인 그런 성향이 강한 신앙이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이나, 갈등이 기독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런 갈등을 일으킬만한 그런 기회가 적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설사 관계의 불편함이 있으면 그냥 그 관계의 불편함에서 피하면 됩니다. 그래도 본인과 자기가 믿는 부처님과의 관계만 있으면, 얼마든지 신앙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지만 기독교는 신앙생활 자체를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관계의 불편함도 생기고, 갈등도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 비해서 자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갈등과 불편함의 빈도수가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불편함이 싫어서, 갈등이 싫어서 일시적으로 피할 수는 있지만, 나는 그 갈등과 불편함을 도무지 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교회를 떠난다든지 아니면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일체 관계를 가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결국에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신앙에서 떠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함께 신앙생활을 해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는 관계의 불편함, 갈등의 여지 들을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12지파로 구성된 나라입니다. 12지파라고 하는 것은 부족 형태의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에는 이스라엘 뿐만아니라 대부분의 나라들이 공동체의 성격에 부족 형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족과 부족 간에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면 그런 문제를 그들은 어떻게 해결했을까? ‘눈에는 이에는 이라고 하는 법을 적용해서 문제, 갈등을 해결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받은 것만큼 값아 준다는 그 원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부족 간에서 생기는 문제와 갈등은 그 원칙을 적용해서 잘 해결을 할 수 있었지만, 같은 부족 안에서 갈등이 일어 났을 때는 그 법칙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너무 무리다. 이렇게 생각하는 케이스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때는 협상을 통해서 화해를 시도하고, 화해를 이끌어 내는 그런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 안에서 관계의 어떤 불편함이나, 갈등의 문제가 생겼을 때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갈등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런 법을 적용할 것인가? 아니면 협상을 통해서 화해를 이끌어 낼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해결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인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지금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18:15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상대편이 나에게 무엇인가? 잘못했을 때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잘못한 내용이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든지, 내 명예를 훼손했다든지, 물질의 손해를 끼쳤다든지 등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내가 그 사람을 찾아가서 권고하라는 것입니다. 권고하라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말해주라는 것입니다. ? 가서 말을 해줘야 하느냐? 그가 잘못한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적으로 내게 사과하지 않기 때문에 사과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너가 나에게 이렇게 상처를 주었다. 너가 이렇게 잘못했다. 하는 것을 가르쳐주라는 의미도 있고, 그 사람은 나에게 잘못한 일이 많은데 정작 본인은 그것을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잘못을 그쪽에서 한 것이라면, 그쪽에서 나를 찾아와서 사과하든, 무엇을 해야지! 어떻게 피해자인 내가 뭐가 아쉬워서 내가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너가 이런 것을 잘못했다. 이런 권고를 해야 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우리는 하게 됩니다. 또 나에게 이렇게 많은 상처를 주고,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냐! 절대 모를 수가 없다. 알고도 사과를 안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모르는 경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랍비들을 분명 저 사람이 나에게 잘못을 했는데 그 잘못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 그럴 때는 무조건 그 사람 앞에 가서 그냥 왔다 갔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아니 저 사람이 왜? 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일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보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게 되고, 그 관계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다 보니깐 내가 이런 부분에서 저 사람에게 잘못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당신이 나에게 이렇게 마음의 상처를 주었습니다. 당신이 이러한 일로 제게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이 아! 제가 모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깨우쳐주시니깐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서 사과를 하거나, 사실은 사과해야겠다는 마음은 먹고 있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가 당신이 일부러 나를 찾아와서 그런 말씀을 하다 보니 내가 더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사과를 하는 경우에는 그 사람을 너가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람을 잃지 않고,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자기가 잘못한 것인지 모르는데 나 혼자만 힘들어하고 있으면서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그 사람을 잃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찾아가서 권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사과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런 경우에는 마태복음 18:16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라고 하는 것은 두, 세 사람을 데리고 가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사람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해 보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이 사람이 잘못한 것이구나! 그러면 같이 갔던 사람들이 권면하는 것입니다. “내가 들어보니깐! 우리가 들어보니깐! 너가 잘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느냐! 아니면 이분에게 사과해라!”그런데도 이분이 사과하지 않으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것이 마태복음 18:17 말씀입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지막은 그 사실을 교회에 이야기해서 교회가 판단해 주십시오! 그러면 교회가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깐 틀림없이 그 사람이 잘못했습니다. 교회가 권면을 합니다. 그 사람에게 사과해라! 그 말을 듣지 않으면 아예 이방인처럼, 세리처럼 마치 같은 교인이 아닌 것처럼 대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하면 교회 공동체에서 내보내라!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교회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교인이라고 볼 수가 없다. 한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냥 그 교회에서 내보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에서 나간다는 것이 신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고대 사회에서 어떤 한 부족에서 부족의 한 사람이 추방을 당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안전을 담보 받지 못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한다든지 항상 다른 부족들의 위협 속에서 살아가야 하고,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족에서 이탈한다는 것! 부족에서 나오게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동물의 왕국에서 보면 사자들도 그룹을 지어서 생활합니다. 사자가 밀림의 왕자이기는 하지만, 사냥을 할 때 빠르고 용맹스러워도 혼자로는 사냥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드시 무리가 팀웍을 이루어서 사냥합니다. 가끔 젊은 사자가 그 사자 그룹의 리더에게 도전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전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에 실패하게 되면 그 젊은 사자는 그 사자의 무리에서 쫓겨납니다. 그러면 외톨이가 됩니다. 밀림의 왕자임에 불구하고 혼자로서는 사냥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굶어 죽을 가능성도 있고, 사자보다는 약한 맹수들이지만, 때를 지어다니는 작은 맹수들의 공격을 받아서 죽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함께하던 어떤 사람이 그 교회 공동체를 떠나게 되면 결국은 신앙에서 떠날 가능성이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가 하는 마지막 권면는 순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이것을 순종하지 않으면 내가 교회 공동체를 떠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미리 예측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하시는데, 그 예수님의 하신 말씀은 기대를 떠나서 어느 시대, 어떤 사람에게나 동일하게 주시는 말씀이고, 동일하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시간과 관계가 없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누군가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 것은 1차 적인 대상이 있습니다. 1차 적인 대상이 누구냐를 이해하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우리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28:19~20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내가 세상 끝나는 날까지 내가 항상 함께있을 것이다. 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1차 적으로 누구에게 했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든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지키게 하는 다시 말하면 복음을 전해서 전도하고, 선교하는 그 사람들에게 1차 적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함께 하시지만, 특별히 복음을 전하는 그들과 주님께서 특별히 함께하시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이 그런 분들에게 더 분명하게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마태복음 18:18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을 예수님이 1차 적으로 누구에게 하신 말씀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갈등의 문제로 서로 힘들어하는 당사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고, 교회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이 땅에서 화해하지 않으면, 그 문제를 풀지 않으면 하늘에 가서도 그 문제는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중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하늘보다는 땅이 먼저입니다. 땅에서 풀어야지만, 하늘에서도 풀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과 갈등이 생긴 문제인데도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만 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만 회개하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순서를 반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하고 회개하면, 하나님과 관계에서 회개하면 땅에서는 저절로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도 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경양성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 이 땅에는 이미 불교도 있었고, 유교도 있었고, 샤머니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믿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유교를 믿지 않았더라도 너무나 오랜 세월 그런 종교적인 문화 속에서 우리가 살았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게 우리 몸에 배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는 사실 그런 것을 다 털어버리고, 그런 옷들을 다 벗어버리고 기독교라는 옷을 입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그냥 여러 가지 그냥 다른 종교의 문화에 영향을 받은 그 옷 위에다가 기독교라는 옷을 입은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기독교인인데 내면에는 샤머니즘의 영향이라든지, 유교적인 영향이라든지, 불교적인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무엇인가 힘들고, 불편하면 쉬운 쪽으로 편한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때에는 샤머니즘 신앙이 편하면 그쪽으로 가고, 유교적인 신앙이 편하면 그쪽으로 가고, 불교적인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경양성이 좋으면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기독교의 모든 신앙의 내용도 그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19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이 말씀도 1차 적으로 누구에게 하신 말씀이냐는 것입니다. 저기서 말하는 두 사람은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이냐? 그것은 갈등 관계있는 두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용서를 구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고, 용서를 해줘야 사람의 입장에서도 용서해준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두 사람 다 그 문제를 두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합심 기도입니다. 같은 문제를 놓고 같이 기도해라! 그러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다른 기도도 다 들어주시지만, 특별히 화해를 위해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해주는 이런 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에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다. 우선 적으로 그런 기도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겠다. 그렇게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0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두세 사람은 누구냐? 1차 적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두세 사람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화해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 화해를 위해서 모인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도 함께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도 그 화해하는 일을 돕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보게 되면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용서해주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예수님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느냐? 주님이 화해라는 것을 얼마나 원하고 계시는가? 이런 것들을 우리가 말씀들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이런 일들을 이루어 내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 그런 것일까?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상처를 받았다고 했을 때 상처는 머리가 받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받는 것입니다. 머리는 상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도 ! 그래! 용서를 구해야지! 내가 잘못했는데!” 또는 저분이 잘못했다고 하는데 내가 용서를 해줘야지!”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몸이 움직이 않습니다. 상처를 받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마음이 상처를 받게 되면, 우리 뇌에서 새로운 생각의 틀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에 대해서 얻게 되는 정보들, 그 사람에 대해서 알게된 여러 가지 정보들은 새로 만들어진 사고의 틀에서 해석하는데 그 새로 만들어진 사고의 틀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정보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 만들어진 틀어 비추어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한 것을 차곡차곡 저장해놓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안 좋은 감정으로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말에 미운 놈은 뭘 해도 미워! 그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미운 사람이 얼마나 미운 짓을 하겠습니까! 우리들의 잘 못된 사고의 틀에서 그렇게 해석을 하기 때문에 그 미운 사람이 아무리 착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하고, 내 마음에 드는 일을 해도 미운 것입니다. 기분 나쁜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참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심리적인 차원에서 용서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왜? 용서가 어렵느냐! 그것은 오늘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23에서부터 마지막 절까지 한 가지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을 해주십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어떤 임금님에게 만 달란트의 빚을 지은 종이 있었습니다. 만 달란트라고 하는 돈은 죽었다 깨어나도 갚을 수 없는 빛입니다. 갚는다고 하는 생각을 감히 할 수도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금액의 빛입니다.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어차피 갚을 수 없는 것이니깐 그래서 그 종의 만 달란트의 빚을 그냥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그 종에게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친구가 이 종에게 100데나리온이라고 하는 빚을 지었습니다. 100데나리온이라는 빚은 1년만 열심히 일을 하면 얼마든지 갚을 수 있는 빚입니다. 그런데 너는 왜 빚을 갚지 않느냐! 빚 독촉을 하다가 결국은 그 친구를 고소해서 감옥에 가게 한 것입니다. 나중에 임금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었던 그 종에 탕감해 주었던 것을 취소합니다. 1만 달란트의 빚을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종도 빚을 갚지 못해서 똑같이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은 이 임금님과 이 종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임금님은 갚을 수 없는 빚 때문에 힘들어하는 그 종을 보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 만 달란트라는 빚을 진 그를 작은 자로 여겨서 그를 소중히 대해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말하면 자기를 낮추는 어린아이와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임금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 달란트를 탕감을 받고도,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친구를 결국 감옥에 보낸 이 종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누가 크냐! 하고 다툴 수 있는 교만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00데나리온을 빚진 그 친구를 작은 자라고 여겨서 오히려 소중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작은 자로 여겨서 하찮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용서를 누가 할 수 있으며, 누가 용서를 해줄 수 있느냐? 임금님처럼 자기를 낮춰서 어린 아이같은 사람이 되며, 자기가 잘못한 것에 있어서 사과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이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해줄 수 있다.

그러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누가 크냐에 관심이 있어서 그것을 다투는 그런 종과 같은 사람 자기보다 작은 자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은 자기가 잘못하고도, 사과할 생각이 없고, 누가 와서 용서를 빌러도, 용서를 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제자들처럼 누가 크냐를 나두고 다투는 사람이냐? 아니면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냐? 거기에 달려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일본과 우리나라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왜? 일본이 위안부 문제라든지, 진용 문제에 대해서 사과를 하지 않느냐! 물론 일본 측에서는 대일 청구권으로 그 문제는 다 해결이 되었다. 그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심정적으로 보면 아직도 일본은 우리를 약소국으로 작은 자로,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나라의 국력이 미국만큼이라도 크다면, 일본이 그래도 우리에게 사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해봅니다. 이런 관계는 국가 간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 안에서 그렇고, 이웃 간에 그렇고 다 같이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고부간의 갈등이라고 하는 것도, 그 이유와 원인은 다양할 수 있지만, 근본적인 것은 똑같습니다. 결국 누가 크냐의 다툼의 문제고 서로를 작은 자라 생각해서 존중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업신여기고, 하찮게 여기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깐 시어머니든, 며느리든 정말 어린 아이처럼 낮추게 되면 자주 잘못에 대해서 사과도 하고, 사과하면 기쁜 마음으로 사과를 받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예수님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몇 번이나 용서해주면 좋겠습니까? 7번 정도면 충분하겠습니까? 7번씩 일흔 번까지 용서해줘라! 490번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이것은 숫자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정적인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너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잘못했을 때 그를 원망하거나 아니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악한 감정을 마음에 품고 있거나, 복수하려는 그런 마음을 가지지 말고, 언제든지 그가 너에게 용서를 구하면, 용서를 해줘라! 용서해줄 땐 마음의 앙금을 남기지 마라! 다시는 그 일에 대해서 거론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아주 쿨하게 용서해줘라! 그것이 7번씩 일흔 번까지 용서해주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쿨하게 용서해주는 것이 490번이라도 용서해줘라! 하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게 되면 모든 것이 다 어려워지고, 힘들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나이 들면 걸어 다니는 것도 힘들어집니다. 듣는 것도 그렇습니다. 보는 것도 그렇습니다. 먹는 것도 그렇습니다. 잠자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예전에는 대게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고, 쉬운 일음에도 불구하고, 나이가 들면서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에게는 그렇게 쉬운 일이고, 익숙한 일도 나이가 들면 어려운 일이 되었는데 평소에 해보지 않았던 용서! 사랑! 이런 것들을 나이 들어서 하려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사랑한다든지, 용서한다든지 그런 것은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부터 그것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이제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고 보면, 나이가 들어서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에 전부 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저절로 기도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기도를 예전보다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용서라고 하는 것은 그 용서라는 문제 하나로 끝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용서의 문제를 풀면, 다른 문제가 연속적으로 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의 문제에서 묶기게 되면 그 하나만 묶기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사업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다른 문제들이 연쇄적으로 풀리지 않고, 묶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용서하는 단 하나의 문제의 문제를 풀어서 나에게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연쇄적으로 풀려나가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그런 기적의 역사! 그런 것들이 우리 가운데 있게 되기를 바라고, 우리가 어렵지만 용서함으로서 그런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하고, 그런 하나님의 기적도 체험할 수 있는 그런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삶의 환경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 이렇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만,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셨고, 때에 따른 돕는 은혜를 주셨기에 오늘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서로 잘못한 일이 있으면, 용서를 구할지도 알고, 용서를 구하면, 쿨하게 용서해주는 것을 아는 겸손하고 성숙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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