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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양의 비유
  • 설교일2020-12-13
  • 성경본문마태복음 18:12-14
  • 설교자정영태 목사
설교게시판 내용
설교내용
본문내용
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어쩌다 듣게 되는 말 가운데 마음 아픈 말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교회에 사람이 없다. 하는 말입니다. ? 교회에 사람이 없다고 느끼게 되었을까? 그것은 교회가 정말 사랑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고, 본인이 사랑을 기대하고, 교회에 나왔는데 아무도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아서 그래서 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주고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면, 교회에 사랑이 있다고 느낄 수 있고, 그저 사랑만을 기대하고, 바라고만 있으면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그렇게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사실 사랑의 문제가 아니고, 신앙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똑같은 하나님을 믿고, 똑같은 예수님을 믿어도 복음적인 신앙이 있고, 율법적인 신앙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서 복음적인 신앙과 율법적인 신앙의 차이는 무엇이고, 교회에 사랑이 없다면 또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배경을 생각해보면, 그 시작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큰 자냐! 하는 다툼에서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다. 그래서 작은 자 한 사람! 어린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소자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예수님이 계속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소자 중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고, 이 작은 자 한 사람중에 그 누구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좌 맷돌을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을 만큼 그만큼 그것이 큰 죄고, 무거운 죄다. 그리고 특별히 마태복음 18:10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무슨 뜻의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도 그를 돕는 천사가 있어서 우리가 하찮게 여기게 될 때 그를 돕는 천사가 하나님 앞에 가서 누가 그 사람을 하찮게 여겼는지를 직고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수 믿는 사람들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돕는 천사가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정말 천사가 있느냐? 이렇게 묻는 것은 신앙의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천사가 있다면, 그 천사의 존재는 어떤 존재이고, 천사들은 어떤 일들을 하는 것일까? 천사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서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천사들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천사들이 있다면, 얼마나 있을까? 천사들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이런 것들이 많이 궁금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막 끝냈을 때 대제사장들이 보낸 일당의 무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몰려오게 되었습니다. 다급해진 상황에서 엉겁결에 베드로가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경호원의 하나의 귀를 내리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칼을 칼집에 넣어라! 내가 지금이라도 아버지께 간구하면, 12군단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할 수 없는 줄 아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신 12군단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로마의 군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군단은 보병 6,000명과 기병 800명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12군단이면, 80,000명 되는 군인의 숫자입니다. 천사를 예수님이 80,000명이라도 일시에 동원을 할 수 있다. 천사가 그렇게 많은가? 놀라운 것은 오늘 예수님은 그 정도의 숫자가 아니라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돕는 천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천사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천사들이 그렇게 많은데 나름대로 천사들도 다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사들에게 이름이 있다고 하는 것은 천사가 인격적인 존재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9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노라

 

내 이름은 가브리엘이다. 이 가브리엘 천사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하는 천사입니다. 유다서 1:9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미카엘은 마귀들을 상대로 싸우는 일을 맡은 천사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4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천사들 중에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천사도 있고, 마귀들과 싸우는 천사도 있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돕는 천사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일일이 그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천사들의 역할 중에 하나가 구원받은 사람을 돕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들에게도 돕는 천사들이 있을 텐데 그 돕는 천사들이 구체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돕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알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한 가지 예가 있습니다.

헤롯왕이 교회를 핍박하면서 본보기로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야고보를 참수합니다. 거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지지를 보내고 열광하자! 이번에는 베드로를 죽이기 위해서 일단 감옥에 투옥합니다. 그때 교회들이 그 베드로를 위해서 많이 기도합니다. 그날 밤 천사가 감옥에 갇혀있는 베드로를 찾아옵니다. 베드로를 돕는 천사입니다. 그가 와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사도행전 12: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홀연히 주의 사자가 나타나매 옥중에 광채가 빛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이 쇠사슬이 손에서 벗어지는 일은 그냥 우연히 자연스럽게 벗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돕는 천사가 그 베드로를 묶인 쇠사슬을 풀어주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서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우리를 돕는다고 그랬을 때 굉장히 구체적으로 이렇게 도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너희들에게는 너희들을 도우라고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 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보내신 우리를 돕는 천사들이 있구나!’ 이렇게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돕는 천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눈에 하찮게 보이고, 우리가 하찮게 생각하는 그 사람에게도 돕는 천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누구든지 하찮게 대하거나, 하찮게 여기거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작은 자가 한 사람이 소중한지를 예수님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도 부족해서 오늘 또 잃은 양의 비유를 통해서 또 한 번 설명하십니다.

제가 성경을 여러 번 읽어 보았지만, 예수님이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강조해서 말씀하신 경우가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누가 크냐! 이렇게 다투는 신앙은 그것은 아주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앙일 뿐만 아니라 그런 신앙이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의 12제자에게만 그런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크리스쳔들에게 그런 일이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우려하신 예수님께서 그래서 이렇게 많이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는 예수님의 질문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마태복음 18:12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사람들에게 한 마리 잃은 양의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만약에 양을 잃어버리게 되면 너희들이 가서 그 양을 찾지 않겠느냐? 그렇게 묻습니다. 그렇게 질문하는 중요한 이유는 그 당시 모든 목자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던질 때 다른 사람들이 그렇지! 다 예수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마음속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비유에 대해서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면 자기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잃은 양의 비유에서 우리가 궁금하게 생각이 드는 것은 그 잃은 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 양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 ? 많은 양들 중에서 잃어버리는 양이 생게 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땅은 우리나라처럼 강수량이 많지 않아서 그렇게 풀이 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주업이 작은 농사와 함께 목축을 합니다. 양을 많이 키웁니다. 양들이 뜯어 먹어야 할 풀들이 많아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풀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목자들은 양을 데리고 풀이 있는 곳으로 계속해서 이동하면서 양들에게 풀을 먹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풀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하다 보면, 어떤 때에는 한 주간 걸릴 때가 있고, 막 풀을 뜯어 먹고 돌아오는데 한 달이 걸릴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양들을 충분히 배불리 먹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양이 10~ 20마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100~200마리 많게는 300마리, 400마리가 되니깐 엄청난 양들을 목자가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여러 가지 일들이 생깁니다. 한 곳에 풀이 있어서 풀을 뜯게 합니다. 목자의 생각에 이제 웬만큼 다 뜯어 먹어서 풀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시 풀이 있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목자가 움직이면 양들은 알아서 목자의 뒤를 쫓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양은 풀을 뜯어 먹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지금 양들이 이동하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계속 풀을 뜯어 먹고 있다가 낙오가 되는 것입니다. 목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양들이 자기를 따라오겠지 생각했는데 그런 양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런 양 떼를 풀이 있는 곳으로 다니다 보면 항상 평지에만 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덕에도 풀이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면 풀이 있는 곳으로 다시 이동 해야 하기 때문에 언덕을 올라가게 됩니다. 언덕길, 비탈길을 가다가 잘못해서 굴러떨어지는 양도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한 번 굴러떨어져 넘어지게 되면 자기 힘으로 잘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런 양을 찾지 못한 목자는 그냥 모르는 체 또 양들을 인도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면 잃어버린 양이 되는 것입니다. 99마리의 양이 1마리의 양을 질투하거나, 시기하거나 그래서 그를 왕따 시키거나, 밀어내지 않았을지라도 그 99마리의 양이 1마리의 양을 잘 챙기지 못해서 그런 일들이 생깁니다. 양들은 다른 양을 잘 챙기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서 풀을 뜯어먹고 있는데, 이동할 때가 되었습니다. 옆에 있는 양이 툭툭치면서 그만 먹어라! 우리 이동할 때가 되었으니 지금 이동해야 한다. 이렇게 챙겨주면 그런 일이 없을 텐데 아무도 챙겨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잃어버린 양! 낙오된 양은 어떻게 되느냐? 양들은 맹수로부터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보호할 수 있는 능력만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발로 집을 찾아가는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찾아가서 양을 구해오지 않으면, 그것은 100% 죽은 목숨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은 자기 발로 자기 집을 찾아올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목자가 찾으러 가야 합니다. 양이 목자를 찾아오는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언제나 목자가 양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99마리의 양과 이제 잃어버린 1마리의 양을 말씀하시는데 1마리의 양은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99마리의 양은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1마리의 양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작은 자! 소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99마리는 제자들처럼 누가 크냐! 하는 것을 두고 다투는 자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크냐! 이 다투는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크냐를 다투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성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5:1~4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지금 누구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시냐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이유는 왜? 예수님이 세리와 저런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느냐! 저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에 대한 불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잃어버린 1마리의 양이 누구입니까?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작은 자 소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99마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는 이 1마리를 잃어버린 양과 남아 있는 99마리의 양을 단순하게 비교한다면 어느 쪽이 더 소중하고,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당연히 99마리가 더 소중합니다. 99마리를 지키기 위해서 1마리의 양을 희생할 수 있다. 99마리를 지킬 수 있다면, 1마리 정도 희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목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1마리의 양이나, 99마리의 양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똑같을까? 그러면 목자는 주님은 도대체 어떤 근거로 잃어버린 양 1마리나 남아 있는 99마리의 양이나 똑같다고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으려면, 두 가지 가능성을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데 하나는 99마리의 양도 언제든지 잃어버린 1마리의 양처럼 너희들도 이렇게 잃어버리는 양이 될 수 있다. 목자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너희들이 잃어버린 양이 아니지만, 너도 잃어버린 양처럼 언제든지 그럴 수 있는 양들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목자의 생각에는 99마리의 양들도 예전에 이미 다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는 그런 양들이라고 보시는 것입니다. 누가 누구를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희들도 이미 다 한 번씩 길을 잃어버렸던 양들인데 문제는 99마리의 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린 시절을 거쳐서 성인이 되는 것인데, 어떤 사람들 중에는 자기는 어린 시절을 거치지 않은 것처럼 처음부터 자기는 성인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양 99마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자기들은 나는 어린 시절을 거치지 않고, 처음부터 성인이다. 그러기 때문에 저 길을 잃어버린 1마리의 양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다툼은 거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생각 때문에 판단하게 되는 것이고,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99마리들이 맞아! 우리도 너처럼 언제든지 길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양들이야!’ 그렇게 생각한다든지 맞아! 우리도 너처럼 예전에 길을 한 번씩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는 양들이야!’ 이렇게 생각한다면 너나 우리나 뭐 다를 것이 뭐가 있나! 다 같은 처지인데, 그러면 길 잃어버린 1마리의 양을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받아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분위기도 똑같은 것입니다. 너나 나나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뭐가 다른 것이 있을 수 있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면 어떤 이야기든 이해해줄 수 있고, 받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는 따뜻한 분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이 자기들은 99마리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1마리 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1마리를 우리가 아주 하찮게 생각하고, 하찮게 대하고 그래서 판단하고, 비판하고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는 아주 냉냉해 지는 것입니다. ? 사람들은 흔히 교회에서는 무슨 말을 못해! 말 하는 것이 누구에게 말하는 것이 두려워! ? 그런 이야기들이 있습니까? 일단 이야기하면 그냥 이해해주고, 받아주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해 주고, 받아주면 그 말이 소문날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해해주고, 받아주려면 너나 나나 같은 처지다. 이런 생각이 있어야지만 가능한데, 나는 너하고 다르다. 너는 길 잃어버린 1마리의 양이고, 나는 남아 있는 99마리의 양 중에 하나야! 이렇게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판단하게 되면 소문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 자기 판단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꾸! 누가 그랬데! 정말 그랬데!’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면 자기가 그렇게 판단한 것이 아!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니고 내 생각이 맞구나! 그런 지지를 얻고 싶어서 계속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하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특징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신 일이 많은데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니 복음 안에서는 누구나 다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고 그냥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만 있기 때문에 그 복음 안에서 누가 누구를 크다고 말할 수 있고, 누가 자신을 들어내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다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다릅니다.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셨으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누가 지키는 것입니까? 우리가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개인차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율법을 더 열심히 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율법을 더 잘 지킬 수가 있습니다. 이런 개인 차이 때문에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차이 때문에 쉽게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정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우리는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복음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사는 것도 복음으로 살아야 하고, 생활도 복음대로 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 누가 크냐! 다투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자라고 할지라도 그를 우리가 하찮게 대하거나, 하찮게 생각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복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마태복음 18:13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잃어버린 양을 찾았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그 양이 소중한 양이냐! 거기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잃어버린 양이 그렇게 소중한 양이 아니라면 찾았다고 한들 뭐가 그렇게 기쁘겠습니까! 별로 소중하지 않은 양인데 그것이 더 할 수 없이 소중한 양이기 때문에 찾은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잃어버린 양에 대해서 강조하려고 하시는 것은 그 잃어버린 양!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작은 자! 소자! 보통 사람들이 가장 하찮게 여기는 그 한 사람이 얼마나 주님 앞에서 소중한 자이냐! 그것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히 여겨주시고, 소중히 생각하시고, 사랑합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하찮게 여기고, 하찮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사람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듯 똑같이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소중히 여기듯 그 사람에게 똑같이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도 주님의 마음처럼 주님이 그들을 그렇게 대하듯 우리들도 그들을 그렇게 대해주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보면 내가 작은 자가 아닐까? 내가 길을 잃어버린 1마리의 양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게도 됩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고사하더라도 우리 자신부터 우리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부터 우리 자신을 하찮게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부터 우리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하는 그런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은 거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나를 하찮게 여기지 않고, 나를 소중히 여기고, 나를 존중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새롭게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누가 크냐! 다투지 않을 수 있는 신앙생활이 되게 해주시고, 다툼이 없는 우리 교회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작은 자를 소중히 여기는 주님의 마음처럼 우리의 마음도 주님 마음 되게 해주셔서 따뜻한 분위기, 사랑이 있는 교회!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복음으로 시작한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끝까지 복음적인 신앙생활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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