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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는 누가 큰 사람입니까?
  • 설교일2020-12-06
  • 성경본문마태복음18:1-7
  • 설교자정영태 목사
설교게시판 내용
설교내용
본문내용
1.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쉽지만 않다는 것은 누구나 다 느끼고 있는 사실입니다. ? 신앙생활이 쉽지 않고, 힘들고 어려운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인 세계를 마치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적 세계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영적 세계의 정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신앙생활이 어려울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이해하고, 경험한 그런 것들을 기초로 해서 영적인 세계도 이해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성을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질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는 전혀 다른 세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또 아무런 연관성 없는 별개의 세상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물질 세계와 영적 세계는 보이지 않게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설명하실 때 하늘나라를 어떻게 설명할꼬,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시기도 하시고,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가지고도 설명하십니다. 이렇게 천국을 비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물질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에 무엇인가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지만 전혀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가치일 경우입니다. 물질 세계가 추구하는 가치! 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영적 세계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전혀 다릅니다.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영적인 세계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자기를 부인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세계에서 추구하는 가치!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 대신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세상의 가치고, 십자가처럼 고난을 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고난이 없는 삶! 성공과 영광만이 있는 그것을 추구하는 그런 삶이 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인 것입니다. 이렇게 가치가 전혀 정반대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힘들 수밖에 없고,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적 세계와 물질 세계의 추구하는 가치가 이렇게 전혀 다르구나! 완전히 반대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어야만, 그래야 비교적 갈등이 없는 그런 신앙생활을 우리가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달아질 때 그때 비로소 그래도 신앙생활이 비교적 갈등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경우는 예수님과 3년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많이 보았고,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말씀도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적인 세계를, 그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예를 우리가 생각해볼 텐데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18:1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하고 질문을 합니다. 질문은 간단합니다.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그런데 그 질문을 언제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1절에서 말하는 그때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3명의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셔서 신비한 체험 하십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내려왔을 때는 귀신 들린 어떤 아이가 그 귀신으로 말미암아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 아이를 치료해 주십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마태복음 17:22~23 말씀입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난 후에 한 번 말씀하신 적이 있고, 변화산에서 내려오셔서 귀신 들린 아이를 치료하시고 난 다음에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이 그렇게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그냥 예수님에게 천국에는 누가 큽니까? 단순하게 질문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을 보면 천국에서 누가 크냐? 하는 문제를 놓고 제자들끼리 서로 변론했다. 서로 그 문제를 가지고, 서로 다투었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자기들끼리 천국에서 누가 크냐? 한참을 다투다가 결론이 나지 않으니깐 예수님에게 와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문제는 천국에서 누가 크냐? 그 문제가 제자들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문제를 가지고 제자들이 다퉈야 했냐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질문을 하게 된 계기가 정말 적절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도 정말 많은 의문이 생깁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이야기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 그런 질문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임종을 앞둔 아버지 앞에서 자식들이 누가 상속을 더 많이 받을 것이냐? 그것을 가지고 서로 논쟁하고, 다투고 있는 모습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아마도 제자들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세우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도 이렇게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물질의 세계! 세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세상의 나라! 그런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이 물질의 세계! 이 세상의 나라에서는 다스리는 자가 있고, 다스림을 받는 자가 있습니다. 요직에 등용이 되어서 아주 귀하게 쓰임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직에 밀려나서 다른 사람에게 주목 받지 못한 상태에서 그렇게 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만약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때 누가 요직에 등용이 될 것인가? 그것이 관심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12명 모두가 다 요직에 등용이 될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가 되었다면 다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싸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12명의 제자 모두가 다 요직에 등용이 되는 것이 아니라 12명의 제자 중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갔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3명의 제자가 특별히 등용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되니깐 제자들 간에 변론이 생긴 것이고, 다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뭐라고 말하든 제자들은 그런 자기들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에 대해서,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두 번씩이나 말씀하셨는데도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이 근심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원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경우가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말씀을 하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처럼 우리가 우리들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들려졌던 예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은 참 복 있는 사람입니다. 정말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풍성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을 다 사람들이 알아듣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기 생각에 사로 잡혀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풍성하게 들려지고 있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말씀의 기간이 있는 그 시대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셔도 누구나 다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해서 누구나 듣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이 예수님이 보실 때 너무 답답해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누가 큰 사람입니까? 묻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천국에서 누구를 큰 사람으로 여기시는가? 누구를 하나님이 소중한 자로 여기시는가? 하는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 제자들이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마태복음 18:3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르시되 진실로예수님께서 자주 쓰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쓰십니다. ‘진실로 진실로이것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강조하려고 할 때 쓰시는 말씀입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하면서 예수님이 내가 지금 하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정신 차려서 들어야 한다. 그러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돌이켜그 말은 옛날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그 어린 시절의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너희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제자들로서는 굉장히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해서 그냥 알아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신 차리고 내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왜? 하필 어린아이와 같아야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인가? 도대체 어린아이가 무엇이기에? 그것은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린아이는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는 어린이 상은 무엇일까? 하는 것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4:20~21 말씀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에 많은 여자들도 있었고, 어린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님이 나누어주는 떡을 먹었고, 물고기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먹은 사람을 계산할 때는 이 여자와 어린아이는 기록에 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통계에 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 현장에 여자들이 있었고, 어린아이들 있었고 그들은 똑같이 떡과 물고기를 먹었지만, 그들이 여자였기 때문에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수에 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아주 하찮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숫자에 집어 넣을 필요도 느끼지 못할 만큼 하찮은 사람들! 거기에 있었지만,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인 사람! 그 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사리 분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자들보다도 더 하찮은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당시의 문화가 그랬기 때문에 여자들도 그렇고, 어린아이들도 그렇고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하찮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예수님께서 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지가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오늘 우리식으로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아이는 어떤 사람인가? “주님! 저는 주님 앞에 내놓을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정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정말 보잘 것이 없는 있는 것이라고 하는 허물 밖에 없는 저는 죄인 중에 죄인이고, 죄인 중에 괴수일 뿐입니다.”그렇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에게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어린아이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18:4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큰 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스스로 나는 정말 하찮은 사람이다. 이렇게 자기를 낮추고, 겸손한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은 크게 보고, 소중한 사람으로 여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조금은 의아한 것은 자기를 낮추는 사람! 겸손한 사람의 예를 왜? 하필 이런 어린아이로 말씀을 하셨을까? 겸손한 사람! 스스로 낮추는 사람의 예가 어린아이 말고도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 하필 어린아이를 예를 들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당시 문화 속에 어린아이의 대한 생각을 유대인들이, 제자들이 다 같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어린아이를 예를 드는 것이 제자들의 이해가 빠르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더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복음 2:6~7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의 상황을 설명하시는 말씀입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여관에 머물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낳았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정말 여러분들 되짚어 생각해보면, 이것이 정말 말이 되는 것인가? 물론 베들레햄 시내 앞에는 여관이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무리 여관이 많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 해산하는 여인이 있는데 누군가는 방을 내줘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여관은 잡았다고 하더라도 베들레헴이 집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 많은 동네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좀 해산하는 여인을 위해서 방을 내줘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도 방을 내주는 사람이 없어서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낳았다는 것입니다. 마구간은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 아니고, 망아지가 태어나는 곳입니다. 그 말이 즉슨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도 사람들에게 하찮은 대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이 마리아와 요셉과 태어날 예수님을 우습게 생각하고, 하찮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방을 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만 이렇게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신 것이 아닙니다. 공생애 3년을 사는 동안에도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 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그 말이 즉슨 여우보다도 못하고, 나는 공중의 나는 새보다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대접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마음을 여러 곳에서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17:12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정말 하찮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지금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라는 것들이 누가 크냐를 두고 예수님 앞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이 이것이 가당키나 하는 이야기입니까! 이런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들었을 때 얼마나 예수님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예수님은 이 작은 자! 어린아이처럼 낮추는 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굉장히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5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그러니깐! 나를 영접할 수 있는 사람은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무엇입니까? 하찮은 사람입니다. 그 하찮은 사람을 하찮게 여기지 않게 여기고, 그를 존중해서 이렇게 영접할 수 있는 사람대접을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예수님도 영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하찮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왔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족에 대한 문제도 이야기합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작은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가 무거운 죄인가를 설명하십니다. 마태복음 18:6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 앞에다가 걸림 돌을 나두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을 시험들게 해서 시험에 들게 해서 죄를 짓게 만들거나, 신앙에서 떠나게 하는 그런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족하게 되는 것이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시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냥 알아서 실족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서 무슨 생각을 합니까? 내가 분명히 세례를 준 자가 메시아인데, 아니 그 메시아는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거야! 내가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데 가장 먼저 하실 일이 감옥에 갇혀있는 나를 구원해주어야 하시지 않나! 그런데 도대체 왜? 오시지 않는 것일까? 정말 그분이 정말 메시아인가? 이것이 스스로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생각 외로 많습니다. 무엇인가 자기 머리로 이해가 안 되면 세상이 왜 이래!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그런 생각을 계속하게 되면 스스로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이 나를 시험을 해서 내가 실족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다른 사람이 시험을 할 경우에도 결과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시험한 대로 실족하는 경우가 있고, 시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족 당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결과는!

중요한 것은 내가 시험을 했는데 그 사람이 실족했던, 실족하지 않았던 시험한 사람에게는 그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사람을 시험케 들게 만들고,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상대방을 아주 쉽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찮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실족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들 예수님의 모습이 이렇게 하찮은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영웅의 모습으로, 군왕의 모습으로, 아주 힘 있는 자의 모습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공생애 초기에서 십자가를 지는 날이 가까이 오면 올수록 가롯유다의 눈에는 예수님이 하찮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쉽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실족하는 문제를 놓고,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마태복음 18:7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세상에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으면 참 좋겠는데, 그러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는데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가롯유다를 생각하면 우리가 금방 이해가 됩니다. 마태복음 26:24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 말은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30에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시험에 들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실족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실족 당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너가 나를 팔아서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이 땅에 올 때부터 나는 십자가에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온 것이고, 지금은 그때가 되어서 내가 십자가에 죽는 것이지! 너가 나를 팔았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해진 대로 내 길을 가는데 거기에 너가 실족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그래서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결과에 대해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면서 자기만 실족한 자에 책임과 무거운 죄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이 다르게 표현한다면 가롯유다 같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 없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가롯유다 같은 사람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가롯유다와 같은 역할을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그 말입니다. 여러분들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느 모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직장을 나가게 되고, 떠나게 될 때 어떻게 보면 나갈 때가 되어서, 떠날 때가 되어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마음에 상처를 주고, 아픔을 주고 그렇게 해서 그를 떠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서 볼 때는 ! 저분이 힘들게 해서 저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고, 상처를 줘서 저분이 떠난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도 이분이 떠날 때가 되고, 시간이 되어서 떠날 텐데 그 사람이 하지 않아도 될 가롯유다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가롯유다의 역할을 하지 않도록 위해서 기도하는 일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겸손해져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하찮게 여기시면 안 됩니다. 하찮게 여기는 것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생각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을 쫓아낼 수 있다. 내가 하면 저놈을 죽일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영적 세계와 물질적인 세계는 이렇게 추구하는 가치가 정 반대 임에 불구하고 왜? 신앙생활하는 우리는 영적 세계의 가치를 따라서 살아야 하는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왜? 세상의 가치를 따라서 우리가 살게 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앞으로 받게 될 기업과 유업이 엄청난 것입니다. 그것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귀한 것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를 따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경험할 수 있고, 때를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이렇게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꾸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살게 되면 세상이 주는 것은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자꾸 추구하고, 그 가치를 따라 살면 세상과는 점점 가까워질 수 있는데 반대로 하나님과의 나라는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해도 그 결과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작은 자가 되는 것이 오히려 하늘나라에서는 큰 자고,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구약에도 똑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5:17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하나님은 당신을 가장 큰 사람으로 여기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사울이 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스스로 작게 여기면서 살았을 뿐입니다. 그런 사울을 보고 하나님은 큰 자로 대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왕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울왕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똑같이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 스스로가 작게 여길 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자리에 앉게 하시고,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큰 물질을 얻게 하시고,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어떤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고 그런 사람들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에게도 그런 은혜가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스스로 낮추고, 겸손하고 이렇게 스스로 자기의 모습을 이렇게 낮추는 사람들에게 정말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더 존중히 여기고, 존중할 수 있는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그런 우리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세상에서 큰 자가 되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게 해주시고, 사람들에게 큰 사람으로 인정받으려 하기보다는 하나님께 큰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전보다도 더 낮아지고, 겸손해진 것이 주님과 더 친밀해진 증거가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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