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용하고 계신 브라우저는 오래되었습니다.
알려진 보안 취약점이 존재하며, 새로운 웹사이트가 깨져 보일 수도 있습니다.
최신 브라우저로 업데이트 하세요!
오늘 하루 이 창을 열지 않음
home   >   교회소개   >   인사말

설교테스트이미지

주님의 교회
  • 설교일2020-11-01
  • 성경본문마태복음 16:13-20
  • 설교자정영태 목사
설교게시판 내용
설교내용
본문내용
13.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니는 이 교회는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그리고 교회가 어떻게 생기게 된 것일까?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를 꼭 다녀야만 할 수 있는 것인가?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6:13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한 문장에 지명과 예수님의 질문이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 예수님의 질문을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또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 이르렀을 때 그런 질문을 하셨다. 그 장소를 저렇게 특별히 말씀하시는 것은 그 지명과 예수님의 질문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을 암시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빌립보 가이사랴 라는 지방은 이스라엘의 최북단 헐몬산 바로 밑에 있는 도시입니다. 헐몬산에서 흐르는 물이 폭포를 이룰 만큼 수량이 아주 풍부한 곳입니다. 이곳을 로마의 황제가 헤롯 안티파스의 이복동생이었던 헤롯 빌립에게 선물로 줍니다. 그래서 헤롯 빌립은 로마 황제로부터 받은 이 영토에다가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합니다. 그리고 그 도시를 로마 황제에게 드린다는 의미로 선물로 드리겠다는 의미로 그 도시의 이름을 황제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라고 붙입니다. 가이샤라 라고 이름을 붙이고 보니깐 지중해 연변에 가이사랴 라는 작은 항구도시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이름이 있다 보니깐 어쩔 수 없이 가이사랴 라는 이름 뒤에 자신의 이름을 덧붙여서 가이사랴 빌립보 이렇게 이름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역은 워낙 산세 깊고, 물이 많고, 물이 맑기 때문에 일반 세상 사람들의 시각에는 신들을 섬기기에 너무나 좋은 장소다. 적합한 장소다. 그렇게 여겼습니다.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굿하기에 너무나 좋은 그런 장소입니다. 그래서 가이사랴 빌립보의 작은 도시에는 많은 신전들이 세워졌습니다. 특별히 로마의 신전은 아름답고, 크고, 매우 화려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했던 예수님은 그 신전들을 바라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데 로마 시대에 들어와서 다 파괴가 되고,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신약에 들어와서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고, 신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신전이기는 하지만, 로마의 신전과 비교해보면 사실 너무 초라한 신전이라는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때 서기관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면 무엇인가? 좋은 일이 생기 나보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나에게도 좋은 일이 있을 수 있겠구나! 그래서 예수님에게 간청합니다. 저도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그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머리 둘 곳도 없는 신전과 크고 아름다운 로마의 신전과 비교하면서 주님은 문 듯 자기를 따르는 많은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저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해서 이처럼 나를 따르는 것일까? 그것이 궁금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이 이르렀을 때는 이미 십자가를 지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게 되었을 때 십자가를 지는 나를 보고 나를 따랐던 무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이해할까? 그런 점도 얼마든지 궁금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그러느냐? 제자들은 조금도 지체 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말하고, 예레미야라고 말하고, 선지자 중에서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일반적인 선생! 랍비보다는 훨씬 훌륭한 사람이라고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이 만약 십자가를 진다면 십자가를 지고 있는 엘리야 선지자! 그런 모습을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도 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걸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제자들에게 묻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어떤 희생 없이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입장은 다릅니다. 그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배도 버렸고, 그물도 버렸고, 좋은 직장인 세관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많은 희생을 지불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나를 따르는 많은 저 무리들과는 입장이 다르다. 너희들은 나를 따르기 위해서 많은 것을 버리고 나를 따랐는데 그런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들의 눈에도 내가 세례요한처럼 보이고, 엘리야처럼 보이고,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보이느냐? 너희들도 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 나를 따르고 있는 것이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그 예수님의 질문이 있은 후에 도대체 얼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에 베드로가 대답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받은 제자들은 많이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정말 예수님은 누굴까? 그래서 3~5분이든 시간이 지난 후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아니면 질문과 더불어 즉시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렇게 대답한 것인지, 아마도 후자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베드로가 3~5분이든 깊게 생각한 후에 그렇게 답변했다면 그렇게 다 베드로와 지성과 이성 속에 나온 대답이고,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6:17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너가 그렇게 깨닫게 된 것은 너의 머릿속에서 알게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가르쳐주셔서 너가 그렇게 알게 된 것이고, 너가 그렇게 고백을 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가르쳐준 것인데 무슨 시간의 간격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질문과 더불어 하나님이 그런 답변을 주시면 즉시로 베드로가 대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연구해서, 종합해서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직접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정확하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냐?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정확한 고백이고,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느냐?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라고 믿어야 하고,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고백이 쉽지는 않은 것은 예수님 전에도 메시아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메시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들 하나님께서 결혼하셨습니까! 결혼하셔야지만 아들, 딸이든 있을 것아닙니까! 결혼도 하시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있으시겠습니까! 이것은 인간을 구원하기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인간의 몸을 입고 온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냥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 속에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과 개념이라는 것이 그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요!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말하면 두 번째 격인 예수님! 예수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그렇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런 대답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대답도 아니고, 생각 속에서 생겨질 수 있는 그런 대답도 아니기 때문에 이 대답을 들은 예수님이 적지 않게 놀랍니다. 이런 대답을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크게 기뻐하면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16:18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지금 사라지기는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본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했던 그 모리아산에 아주 크고 넓은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를 제단 삼아 아브라함이 그 바위에 이삭을 눕혀놓고, 제물로 드리려고 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다가 성전의 터를 세우고, 성전을 세운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구약의 성전도 반석 위에 세워졌던 것처럼 신약의 성전도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세우는 새로운 성전! 그 교회도 똑같이 반석 위에 세울 것이다. 그런데 그 반석은 구약의 성전 터의 반석과 조금 의미가 다른 반석이다. 그 반석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그 사람들이 반석이다. 주님은 그렇게 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 고백하는 사람들이 바위처럼 견고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인데 그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교회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계획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50일째 되는 날! 승천하시고 10일째 되는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이 열심히 기도하는데 그곳에 성령이 임하면서 거기서 교회가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 그렇게 시작된 교회를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내 교회다! 내가 세운 교회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교회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시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곧 교회고, 교회가 곧 예수님인 것처럼 주님은 그렇게 생각하시고 그렇게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합니다. 너무나 집요하게 핍박하니깐 예루살렘에 있던 성도들이 다메섹으로 도망을 갑니다. 다메섹은 이방지역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국경을 넘어서 중국으로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만주로! 그런데 사울은 거기까지 도망친 예루살렘의 성도를 잡으러 다메섹까지 간 것입니다.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 질문을 들은 사울로서는 의아합니다. 당신이 누구시기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박해를 했다면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을 박해을 한 적이 있지만, 지금 저에게 왜 나를 박해하느냐! 묻는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당신을 박해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재차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다! 그때서야 사울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교회를 주님의 교인들을 하나로 생각을 하는구나! 그래서 예수님이 교회에다가 엄청난 선물을 주십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16:19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교회에 준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천국의 열쇠를 가지고, 열쇠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합니다. 열쇠를 가지고 문제를 메이게도 하고, 풀기도 합니다. 하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권세와 그런 역할이 교회에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런 권세를 교회에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천국열쇠를 가지고 정말 구체적으로 무엇을 묶는 것인가? 무엇을 푸는 것이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늘 문을 열고, 하늘 문을 닫는 것인가? 성경에는 세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18:15~18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어떤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범죄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찾아가서 너 무슨 죄를 지었지, 너 그러면 안 된다. 너 회개해라! 돌이켜라! 그렇게 권면을 했는데 안 들어요! 그래서 친구 몇 명과 같이 가서 권면합니다. 그러면 안 된다. 회개해라! 안 들어요! 그래서 교회에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교회가 그를 불러서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말도 거절합니다. 그러면 교회는 그 사람을 내치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처럼 여기라는 것은 더 이상 교회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그 사람은 교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밖으로 내쫓으라! 이것을 우리들이 쓰는 용어로는 출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내쫓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묶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냐면 만약에 우리 교회에 이런 일이 있었더라면, 만약에 과정 아니! 교회가 신당중앙교회밖에 없냐! 옆에 신일교회, 약수교회도 있고 내가 뭐 그 교회 가면 되지!’ 그렇게 해결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여기서 묶였기 때문에 다른 교회를 아무리 다닌다고 하더라도 하늘에서도 묶여있기 때문에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여기로 와서 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교회의 권세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현대 교회가 그런 것을 악용해서 사실은 너무나 쉽게 출교를 시키고 이런 일들이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교회가 한 일은 그것은 교회가 주님께서 주신 천국열쇠를 가지고, 땅에서 묶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서도 묶이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마태복음 18:19~20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계속 강조되는 것이 두, 세 사람입니다. , 세 사람이 교회를 이루는 기본단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는 교회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교회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교회의 단위가 두, 세 사람입니다. 그 두, 세 사람 속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겠다고 하십니다. ? 교회니깐! 그런데 그 두, 세 사람이 합심해서 무엇을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합심해서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것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기도를 통해서 하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오해하면, 하나님의 의지나 뜻과 상관없이 그냥 우리가 천국열쇠가 있으니깐 우리가 그냥 간절히 기도만 하면 우리 뜻대로 하늘 문을 닫기도 하고, 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 문 열쇠를 주신 분의 뜻에 따라서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합니다. 그런데 천국열쇠를 주신 분의 뜻에 상관없이 내 뜻대로 열고, 닫아서는 열리고 닫히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하늘 문을 열었던 선지자 중에 대표적인 선지자가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땅 3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땅은 강수량이 작은 곳이기 때문에 1년만 비가 안 와도 농사에 엄청난 타격을 입습니다. 그런데 3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고 하면, 이스라엘 땅에 거지가 넘쳐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런 땅에 엘리야가 간절하게 기도함으로 36개월 동안 닫혀있던 하늘 문이 열리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정말 천국열쇠로 하늘 문을 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열왕기상 18:1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여기서 말하는 내가가 누굽니까? 하나님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에 비를 내리시기로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겠다고 생각하셨다면 비를 내리시면 그만 일 것을 왜 굳이 엘리야에게 비가 내리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비를 내리시겠다고 결심을 했더라도 그것을 엘리야의 기도로 통해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만약에 그 일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비가 내리겠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의 생각은 늦쳐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36개월 동안 닫혔던 문이 4년도 갈 수 있고, 5년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에 주어진 천국열쇠인 기도라고 하는 것은 굉장한 권세니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권리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기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의무적인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생각할 때 그냥 내가 필요하면 하고, 내가 필요 없으면 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쉬우면 기도하고, 아쉬울 것이 없으면 기도하지 않고, 기도의 성격이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가 늘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교회가 대단한 곳인가? 왜냐면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입니다. 불교와 기독교가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불교는 개인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이 각자가 알아서 수련을 통해서 부처가 되면 됩니다. 그러니 불교 인들은 굳이 법당에 모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두, 세 사람이 모여야 비로소 교회가 되기 때문에 모이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니깐 기독교의 신앙생활은 절대 혼자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니니깐 반드시 두, 세 사람이 모여야 교회가 되고 두, 세 사람이 모여야 신앙생활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매번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암송합니다. 하나님의 대한 신앙고백도 하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도 하고 그다음에 성령에 대해서 신앙고백을 이렇게 합니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이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성령이 교회를 만드신 것이고, 그 교회의 본질이란 성도의 교제가 있는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성도들의 공동체다! 성도들이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라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는 교회를 그렇게 정의하고 그렇게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는 성령께서 오순절날 120명이 모인 곳에 성령을 주셨던 것처럼, 지금도 언제나 성령은 교회를 통해서 은혜를 주시고,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물론 여러분들 개인적으로 기도원에 가서 은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개인도 우리 신당중앙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개인으로는 그런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어야 성령의 은혜도 받을 수 있고, 성령의 역사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949년에 중국이 공산화가 되면서 교회가 핍박을 받기 시작합니다. 1966년부터 7610년 동안 중국 안에 문화혁명이 일어나면서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시작이 되는데 그 타겟이 지식인들도 있고, 정적도 있고 많은데 그중의 하나가 교회였습니다. 얼마나 집요하게 핍박했던지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남을 수가 없어서 다 철수를 합니다. 그리고 많은 교회가 문을 닫았고 다 잡혀가서 죽기도 하고, 강제 노역에 끌려가기도 합니다. 그런 생활이 길어지다 보니깐 서구에 있는 모든 교회가 생각했습니다. 중국 땅에는 교회가 없다. 사라졌다.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고 보니깐 무슨 소리입니까! 1억 명 정도가 되는 교인들이 지하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걸리면, 기도하다가 걸리면 죽거나, 강제 노동소로 끌려가서 평생 나오지 못하고 거기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위험한 분위기 속에서 집에서 혼자 성경 보고, 기도하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집에서 여러 명이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이 낫겠습니까? 우리의 이성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각자 흩어져서 서로 모르는 척하고 각자가 집에서 성경을 보고, 예배드리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였다가 적발되어서 죽는 경우도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지하에서 다른 가정에서 은밀하게 두, 세 사람, , 다섯 사람 여섯 사람 많게는 열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의지에서는 절대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두렵기 때문에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는가? 성령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성령이 계속해서 그들을 권면한 것입니다. 자 그들이 모였는데 말씀을 가르쳐줄 목사님, 전도사님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교회가 되겠는가? 그것이 미스터리입니다. 성령이 직접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직접 그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하교회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 어느 나라든 교회가 쇠퇴하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와 문제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와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상실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70~80년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흥하는 교회? 두 교회를 뽑으라고 하면 영락교회하고, 순복음교회를 뽑을 수 있습니다. 정말 단시간에 그렇게 큰 교회가 된다는 것은 교회 역사상에도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영락교회가 어떻게 해서 저렇게 부흥하고 성장할 수 있었을까? 그 원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것을 논문으로 쓰신 분들도 많습니다. 그것을 읽어보니깐 물론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의 훌륭한 점! 그분의 겸손한 리더쉽! 탁월한 설교 능력! 이런 것들도 있었지만, 놀라운 것은 그것보다도 영락교회를 그렇게 성장하고, 부흥시켰던 가장 근원적인 힘은 구역에 있었다는 결론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락교회 안에 수 많은 구역 조직들이 있었는데 그 구역 조직들이 지금 말하면 공동체입니다. 10~12명 정도가 되는 공동체가 가족처럼 활성화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작은 구역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어서 나름대로 공동체들이 살아 움직이다 보니깐 그것이 교회 전체를 성장하고 부흥케 하는 요인으로 작용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님도 사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서대문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자기도 큰 교회에 대한 비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데, 꿈을 꾸게 되었는데 어떻게 교회를 크게 부흥시킬까? 본인도 많이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그분도 영락교회를 가서 영락교회를 은밀하게 연구를 한 것입니다. 영락교회가 어떻게 이렇게 부흥을 했을까? 그런데 조용기 목사님의 눈에도 그것이 눈에 들어 온 것입니다. 구역! ! 이것이구나! 그래서 본인도 순복음교회를 하면서 영락교회처럼 구역 조직을 많이 만들고 강화를 시킨 것입니다. 지금도 순복음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힘이 구역입니다. 그 구역이라고 하는 것이 공동체적으로 움직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영락교회가, 순복음교회가 정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하나씩 되었습니다. 한쪽 장로회를 대표하고, 한쪽은 오순절을 대표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서 침체되는 교회들 이런 교회의 목사님들이 한국은 기독교 역사도 짧은데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있을 수 있는가? 연구의 대상이다.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영락교회에 가서 연구하고, 순복음교회에서도 연구하는데 그중에서 제가 직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께 자기도 교회가 안 되어서 한국에 왔다가 순복음교회에 가서 충격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보니깐 순복음교회에는 구역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합니다. ! 저거구나! 그래서 이분이 미국에 돌아와서 우리는 구역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은 조금 변형시켜서 셀이라고 말을 만든 것입니다. 셀 중심으로 목회를 한 것입니다. 부흥이 된 것입니다. 미국도 셀 중심으로 목회한 교회들은 다 부흥이 된 것입니다. 셀이든, 구역이든 이름은 다르지만 가지고 있는 의미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활성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깐 한국에서 침체 된 교회들은 미국에서 부흥하는 교회가 부러우니깐 그쪽에 가서 배우는 것입니다. 가서 보니깐 셀을 하니깐 셀 목회하니깐 부흥이 되는구나! 그러니깐 셀이 역수입이 되어서 한국의 젊은 목사님들이 지금 셀 목회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셀 목회를 하는 교회들도 부흥을 하는 것입니다. 시작은 구역에서 시작해서, 셀로 다시 돌아왔는데 왜? 그러면 지금은 영락교회도 그렇고 순복음교회도 그렇게 옛날 같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구역이라고 하는 이름은 똑같이 존재하는데 그 구역이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는 구역이 아니라 그냥 조직적인 구역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구역이 활동은 하는데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당면한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그러면 왜? 구역들이 그렇게 되었을까? 그것도 여러 가지 원인과 이유가 있습니다. 옛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교회에 대한 헌신과 충성도가 남달랐기 때문에 그렇게 구역을 헌신적으로 잘 돌보았기 때문에 그 공동체가 살아있을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우리가 사회적인 개인적인 문화를 영향을 받다 보니깐 그렇게 충성하시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회적인 여권이 시간을 내기도 어렵고 그런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교회 제도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교회가 크지 않았을 때는 사실 공동체성이 강한 교회였습니다. 그 대신 교회에서 하는 일은 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먹구구식으로 한 것입니다. 대충! 왜냐면 교회가 별로 크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 디테일한 조직! 행정! 관리 이런 것들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냥 주먹구구식으로 운영을 해도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갑자기 급성장을 하다 보니깐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는 것이 너무 이상한 것입니다. 규모가 이정도로 되는데 어떻게 구멍가게식으로 큰 교회를 운영하냐! 안 된다. 그래서 뭔가 일의 효율성도 그렇고, 관리 차원에서도 그렇고 주먹구구식으로 하지 말고 새롭게 해야 한다. 그리고 가지고 들어 온 것이 사회의 기업문화, 직장에서 사용하는 조직, 시스템을 가지고 들어 왔습니다. 왜냐면 교회는 그런 것이 없으니깐! 그래서 그들이 가져와서 그것을 다 교회에 적용을 시킨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좋아진 것이 많아집니다. 이제는 주먹구구식으로 안 하고 무엇이든 체계가 잡혀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러니 눈에 보기에는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교회도 세련 되고, 뭔가 교회다운 교회가 된 것으로 생각했는데 너무 거기에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다 보니깐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다 보니깐 공동체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금도 가나안 교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를 조사해보았습니다. 가장 많은 대답이 무엇이냐면 교회 와서 자기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가 느꼈던 교회는 회사 같은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교회냐! 기업이지! 이것이 무슨 교회냐! 직장이지! 그런 느낌을 너무나 많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교회 같지 않은 그런 것을 내가 다닐 이유가 없다.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교회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 다른 유럽교회가 겪었던 문제를 지금 다 겪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성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느냐 이 과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해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교회가 일을 많이 하면 안 됩니다. 일 중심의 교회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 있기 때문에 조직이 필요한 것입니다. 일을 하다 보니깐 시스템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지금까지 해오던 일들이 지금까지 다 나쁜 일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고, 좋은 일들이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는 일해도 이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어떤 일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성령에 순종해서 그런 일들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고 커지다 보니깐 그런 것과 상관없이 우리 교회의 규모가 이정도 되니깐 이런 정도의 일은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한 것입니다. 다른 교회에서 A이란 일을 하는데 우리라고 못하냐! 그래서 A이란 일을 만듭니다. 일을 많이 만듭니다.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고 다 일을 만들어 놓고 보면 일을 맡겨야 할 사람이 필요로 합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맡겨 놓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정말 자원을 해서 그 일의 필요성을 느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그냥 일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공동체성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그것은 마치 회사에서 하기 싫어도 월급 때문에 일하는 것처럼 그렇게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될 수 있으면 일을 줄이고, 말씀과 기도로 함께 교제할 수 있는 이 공동체성을 먼저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서 일단 그것이 회복이 되어서 건강해지면 그다음에 무슨 또 교회에 필요한 일들이 있으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교회들이 그러나 지금은 일들은 많이 하는데 사실은 교회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공동체성이 없어집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보존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기쁘고 이래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에서 하는 일 때문에 다투고, 싸우고, 상처받고 그것 때문에 서로 틀어지고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이미 공동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공동체성을 쉽게 이야기하면 가정에서 가정이 하나의 공동체인데 가정에서 아버지가 무엇을 잘못했다든지 아들이 무엇인가 잘못했다고 그러면 그것 때문에 싸우고, 그릇이 깨지고 그럽니까? 등 돌리고 말 안 하고 그럽니까? 그러지 않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조직안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등집니다. 말 안 하게 되고, 상처받게 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적어도 주님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면 그 교회는 다 주님의 교회입니다. 설사 그 교회가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교회인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인가 잘못할 때 비판할 수 있습니다.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지나치게 정죄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크리스천인 들은 왜냐면 우리 눈에 볼 땐 문제가 많지만, 문제가 많아도 그곳은 주님의 교회인 것은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것을 이야기하면서도 주님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에 기도를 많이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는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 교회가 우리 눈에 볼 때 회개도 안 하고, 잘못한 일을 반성도 안 하고 그렇게 계속 가게되면 어떻게 될까?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다 알아서 합니다. 주님의 교회이니깐!

예를 들면 사울을 하나님께서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왕으로 세울 땐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니깐 하나님이 어느 날 사울왕을 폐하시고 다윗을 세웁니다. 똑같습니다. 여러분들 계속해서 개인의 교회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교회를 폐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웁니다. 어떤 교파를 폐하고 새로운 교파를 만들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지 사라지는 교회와 새로 생기는 교회만 있을 뿐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주님은 더 심각하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전서 4:17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떠하며

 

심판은 어디서부터 시작이 되느냐? 교회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지금 하나님이 심판의 때를 늦추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지 주님이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하나님이 심판하기 시작하면 이제 심판의 때가 왔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두려운 것입니다. 그 일이! 교회가 심판을 받는 것이 속이 시원할 것 같지만 이미 교회가 심판받기 시작하면 세상의 심판이 가까이 온 징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많은 눈물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교회와 자기를 동일시 여기기 때문에 교회와 교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끼리도 예를 들어서 누구를 핍박하거나, 박해하거나, 심한 말을 하면 주님의 입장에서는 다 자기에게 하는 것처럼 주님이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교회만 박해하는 것을 주님을 박해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되고, 교인이 교인을 박해하는 것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우리 교인들은 다 주님을 대하듯이 그렇게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함부로 말을 하거나, 함부로 상처를 주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 하는 것이니깐! 주님께 대하듯 하게 하면 우리가 모든 면에서 품위 있게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교회를 말하기를 우리 몸에 지체가 있는 것처럼 지체들이 다 모이면 몸을 이룬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발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다 모여서 주님의 몸을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팔이 잘려 나간다면, 팔이 떨어져 나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팔은 죽게 됩니다. 똑같이 우리가 다 한 사람씩 모여서 주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었는데 거기서 우리가 떨어져 나가면 그 신앙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라기는 그래도 우리 교회만큼이라도 주님께서 주신 천국열쇠를 가지고 정말 묶기도 하고, 풀기도 하고, 닫기도 하고, 열기도 하는 그런 능력 있는 주님의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주님이 생각하시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를 만드는 그일이 우리 생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고, 가장 보람 있는 일이고, 가장의 의미 있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정말 그렇게 하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케 되는 하나님의 복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임을 기억하게 하셔서 교회의 교회 됨을 숨기거나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주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우리들 스스로가 주님의 교회임을 기억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주님을 대하듯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하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주님의 교회! 건강한 우리 신당중앙교회가 되도록 끊임없이 우리 교회 가운데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facebook tweeter line band
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120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인관리자2021-04-18
119바리새인처럼 되지 말라관리자2021-04-11
118어떻게 부활이 있을 수 있습니까?관리자2021-04-04
117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관리자2021-03-28
116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관리자2021-03-21
115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은 자관리자2021-03-14
114누가 주인인가?관리자2021-03-07
113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관리자2021-02-28
112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관리자2021-02-21
111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관리자2021-02-14
110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관리자2021-02-07
109신앙생활은 섬김의 삶입니다관리자2021-01-31
108처음과 나중은 바뀔 수 있다관리자2021-01-24
107우리는 무엇을 버렸는가?관리자2021-01-17
106부자 청년의 질문관리자2021-01-10
105성령이 답입니다관리자2021-01-03
104결혼과 이혼관리자2020-12-27
103용서관리자2020-12-20
102길 잃은 양의 비유관리자2020-12-13
101천국에서는 누가 큰 사람입니까?관리자2020-12-06





탑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