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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그 이후
  • 설교일2021-07-18
  • 성경본문마태복음 26:47-56
  • 설교자정영태 목사
설교게시판 내용
설교내용
본문내용
47.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코로나19에 대한 염려보다, 더 큰 하나님의 평강이 이 아침에 하나님을 예비하는 신당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 가운데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할 때 제자들은 그 소중한 시간에 기도하지 못하고, 잠을 자게 됩니다. 우리들을 궁금하게 하는 것은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기도하셨던 예수님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고,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었던 제자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먼저 마태복음 26:47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가룟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큰 무리와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왔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큰 무리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그 수가 얼마나 되는 무리를 가리키는 것일까? 예수님과 11 제자를 완벽하게 제압해서 체포를 하기 위해서는 얼 만큼의 병력이 필요할까? 예수님을 체포하는 장소가 감람산이었고, 때가 한밤중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12명을 제압하고 체포하려고 하려면 그 12명보다는 최소 3배나, 많게는 5배 정도가 되는 병력이 있어야만 그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말하는 큰 무리는 최소 30명에서, 50명 정도 되는 그런 수가 아닐까? 하는 것을 우리가 예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30명 내지 50명의 사람들은 다 칼과 몽치로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몽치라고 하는 것은 우리 조선 시대에 포졸들이 들고 다녔던, 길이는 짧지만 굉장히 단단한 나무 몽둥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칼을 휴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경비하는 성전경비대원들도 칼이 아닌 몽치로 무장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들 가운데 몽치로 무장한 자들이 있었다. 하는 그 말씀은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성전경비대를 동원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칼을 소지하고 있었던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공식적으로 그들이 칼을 소지한 것이 아니라 아마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로마 몰래 어디서 은밀하게 구입한 칼을 소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무리들이 칼과 몽치로 무장하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지만, 사실 예수님을 체포하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을 잡아야 할 장소가 산이었기도 하지만, 시기적으로 한밤중이기 때문에 사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추포하는 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연배가 비슷했기 때문에 그 밤중에 정말 누가 예수님인지, 누가 예수의 제자인지를 식별하고 구별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손쉽게 예수를 체포할 수 있는가를 놓고 그들이 많이 고심하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 낸 계략이 마태복음 26:48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이렇게 계략을 새운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6:49~50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계략을 실행해 옮깁니다.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가룟유다의 행위는 굉장히 가증스럽게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랍비라고 부르면서 입 맞추면서 그러나 속으로는 예수님을 배신할 생각으로 그러 짓을 했다는 것을 뻔히 아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그런 가룟유다가 역겨웠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 가룟유다를 가리켜서 친구여! 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그런 자를 가리켜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 예수님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함으로 마음을 정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미 마음을 정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속에 평정이 있었고, 그래서 친구라고 부를 수 없는 가룟유다를 향해서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로 우리들의 마음을 정할 때까지가 어렵고, 힘든 것이지! 일단 마음을 정하고 나면 정말 친구로 부를 수 없는 사람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의 마음에는 흔들리지 않은 평강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또 궁금하게 생각이 드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문제를 놓고 동일한 기도를 세 번을 드립니다. 그리고 세 번 끝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정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기도로 마음을 정하기 위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동일한 기도를 세 번을 하면 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정할 때까지 세 번의 기도가 필요할 수 있고, 여섯 번의 기도가 필요할 수 있고, 아홉 번의 기도가 필요할 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정해질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왜 세 번 만에 그렇게 마음을 정할 수가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를 정확히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생각 속에 세 번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상황이 확정된다고 하는 그런 개념! 그렇게 세 번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를 했고 그렇게 해석을 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의 율법 전에 남자가 이혼을 할 때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는 누구누구와 이혼을 한다. 하고 세 번을 크게 외치면 그것으로써 이혼이 확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1년에 세 번 성인 남자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을 방문하도록 의무사항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뵈러 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왜 하필 세 번일까? 그 세 번이라는 숫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우리가 1년의 세 번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무를 다한다. 그렇게 그들은 이해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또 한 가지 궁금한 것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감람산에 있을 줄을 어떻게 알고 무리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게 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26~27&30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월절 식사 도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유월절 식사 도중에 예수님을 팔자가 누구냐?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지목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룟유다가 식사 도중에 밖으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간 가룟유다가 어디로 갔을 것이라고 여러분들은 생각하십니까? 밖으로 나간 가룟유다가 나간 즉시 대제사장을 찾아가서 예수를 잡을 기회가 지금이라고 아마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체포할 체포조를 구성을 해서 부랴부랴 예수님께서 유월절 식사를 했던 마가의 다락방으로 들이닥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와서 보니깐 이미 예수님은 유월절 식사를 끝내시고, 어디론가 가셨는지 그 자리에 없으신 것입니다. 가룟유다가 사람들을 데리고 왔는데 막상 예수님이 그 자리에 없게 되니깐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디로 갔을까? 아마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을 내렸습니다. 가룟유다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누가복음 22:39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예수님은 늘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면, 아주 습관처럼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것을 가룟유다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이 밤에도 기도하러 감람산에 가셨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룟유다의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잡으려는 많은 수의 무리들과 함께 직접 감람산으로 가지 않고, 일단 마가의 다락방에 드렸다가 예수님이계시지 않으니깐 감람산으로 갔을 것이다. 어떤 근거로 우리는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일까? 마가복음 14:50~52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도대체 이 본문에서 나온 한 청년이라고 하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그 청년이 왜? 그 밤중에 그곳에 있었을까? ? 그 청년은 다른 사람들처럼 옷을 입지 않고, 베 홑이불을 두르고 있었을까? 이런 것들에 의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청년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는 순간 제자들이 다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을 치는 사람은 도망하는 일이 급급하기 때문에 좌우를 둘러볼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도망가는 처지에 제자들이 그것도 한밤중에 한 청년이 베 홑이불을 입고 있다가 그것을 벗고 도망하는 그 사실을 볼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설사 도망치는 11 제자가 이 젊은 청년이 베 홑이불을 버리고 도망치는 그런 광경을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자들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서 그 사건을 성경에다가 기록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마태복음에도, 누가복음에도, 요한복음에도 그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직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 청년은 마가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가는 왜? 그 부끄러운 장면을 굳이 자기가 기록한 마가복음에 기록을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마가는 그날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 나도 그 증인 중에 하나다. 하는 것을 밝히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마가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옷을 입지 않고, 베 홑이불을 두르고 있었을까? 아마도 가룟유다가 수많은 무리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을 덮쳤을 때 그때가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마가는 잠들기 위해서 잠자리에 누웠던 것 같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두런두런 소리가 들리니깐 아마 일어났을 것입니다. 상황을 보니깐 가룟유다가 많은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다 칼과 몽치로 다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순간 마가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 예수님을 잡으러 온 것이구나! 얼마나 마음이 급했겠습니까! 이 위험 사실을 빨리 감람산으로 가서 예수님에게 알려야만 되겠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그래서 자리에 누운체 두르고 있었던 홑이불을 두른체 열심히 감람산으로 달려갔는데 그 무리보다 한 발짝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위험한 상황을 예수님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그저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이 잡히시는 그 광경만 지켜보다가 그만 본인도 붙잡힐 형편이 되니깐 베 홑이불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도망을 친 것으로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할 때 제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51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제자중 어떤 한 사람이 거세게 저항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순순히 체포당하셔서 끌려가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칼을 뽑아서 휘두른 것입니다. 그 제자중에 누가 그랬을까? 요한복음 18:10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칼을 휘두른 장본인은 베드로였고, 베드로가 칼을 휘두려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쳤는데, 배워 버렸는데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원래 종들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름이 있는 종은 없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베드로가 칼을 휘두려서 그 귀를 잘라버린 그 사람의 이름을 말고라고 기록을 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의 종이였다. 이름은 말고다. 그런 것을 보면 이 말고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일반적인 종이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는 평생 모세의 부관으로서 지냈습니다. 모세의 부관으로서 평생 모세를 따랐던 여호수아를 가리켜서 여호수아 1:1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평생 모세를 옆에서 보좌했던 여호수아를 가리켜서 그 부관을 가리켜서 모세의 종이라고, 그렇게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이 대제사장의 종 말고도 일반적인 종이 아니라 여호수아처럼 대제사장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대제사장의 부관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이 대제사장의 부관이 성전 경비대의 책임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마도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체포하는 일에 성전 경비대를 동원했고, 그 책임자였던 말고가 예수님을 체포하는 그 작전을 앞에서 진두지휘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베드로가 칼을 뽑아서 말고의 종의 귀를 떨어뜨렸다. 이것은 제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훌륭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약속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예수님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저는 절대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예수님께 약속했던 지금 베드로는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칼을 뽑아서 휘두른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목숨을 걸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누가 봐도 베드로는 충성스러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문제는 베드로가 목숨을 걸고 칼을 휘둘렸는데 그래서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의 귀를 베어버렸는데 그때 예수님은 어떻게 해야하는 것입니까? 적어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떻게 할 것이라고 기대를 했겠습니까? 제자가 목숨을 걸고 칼을 뽑아 휘둘렸다면 예수님은 무엇인가 상응하는 어떤 기적을 행하시든지, 어떤 능력을 행하시든지 그런 조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반응을 예수님이 보이십니다. 누가복음 22:50~51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6:52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그런 태도를 정말 제자들이 특히 베드로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러시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누가복음 22:35~36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이제는 검이 없으면,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 아니 겉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고 말씀하신 적은 언제인데, 이제 와서 검을 쓰니깐 검을 칼집에 꽂으라!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으면 왜 겉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 이런 말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시는 것인가? 이것이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이해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고 한 것은 그 검을 가지고 예수님을 지켜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검을 휘둘려서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치라고 그런 의미로 검을 사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을 칠 때 그 제자들이 큰 무리들에게 붙잡히지 않고, 안전하게 도망치도록 해주시려고 그래서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그 병력들에게 여러 가지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 중에는 칼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 생각 속에는 아! 제자들도 만만치가 않구나! 제자들 나름대로 무엇인가? 무장하고 있구나! 이렇게 판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면 칼을 휴대하고 도망치는 제자들을 그 밤중에 그것도 산속에서 뒤쫓는다고 하는 것은 쫓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고,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병력이 동원했지만, 도망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추격하지 않고, 그냥 예수님만 체포해서 그들이 가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을 생각하면, 그렇게 마음이 뭉클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예수님만 나두고 다 도망치는 제자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마음이 서운하고, 그런 제자들에게 배신감마저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제자들이 붙잡히지 않고, 안전하게 도망가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13:1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주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홀로 나두고 다 도망치는 제자들을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배신감을 느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저 안전하게 붙잡히지 않고, 도망치기를 예수님이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옷을 팔아서 검을 사라고 하는 배려를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제자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던 그 사랑으로 오늘도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또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지금이라도 12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할 수 없는 줄 아느냐! 내가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게 되면 성경의 예언이 어떻게 되겠느냐! 그 말씀의 의미는 지금 이문제는 하나님과 나와의 문제지! 나를 잡으러 온 저 많은 사람들과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셨던 예수님과 기도하지 못했던 제자들의 차이입니다. 기도를 하면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 나의 문제가 됩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지 않으면 모든 문제는 환경과 상황과 나의 문제요! 다른 사람들과 나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문제든 그 문제는 다 하나님과 나의 문제로 하나님은 만들어 주시고, 그것이 하나님과 나의 문제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기도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많은 문제들은 대부분 우리의 마음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겪게 되는 어려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마음을 정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기도로 마음을 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정해지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것까지 참으라! 이것까지 참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으면 더 할 이야기 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삶의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데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합니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문제가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문제가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왠지 문제가 나를 찾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선제 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아직 문제가 있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문제는 찾아오지 않았지만, 그 문제가 오기 전에 기도함으로 마음을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단 기도로 마음이 정해지게 되면 문제가 찾아와도 그 문제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그 문제로 인해서 과민 반응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자신은 주님을 위해서 칼을 휘두른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이 가는 길을 가로막는 일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위해서 칼을 휘두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길을 가로막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기도하는 삶을 통해서 뜻을 정하고, 마음을 정하고 사는 우리들의 복된 신앙생활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 어떻게 변화든 그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 변화 때문에 마음의 평정심을 잃어버리거나, 그 변화 앞에서 과민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항상 우리들의 마음을 지켜주시옵소서. 세상이 어떻게 변화든지 항상 뜻을 정하고, 마음을 정하고 사는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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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인관리자2021-04-18
119바리새인처럼 되지 말라관리자2021-04-11
118어떻게 부활이 있을 수 있습니까?관리자2021-04-04
117가장 큰 계명은 무엇인가관리자2021-03-28
116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관리자2021-03-21
115청함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은 자관리자2021-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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